다시 만난 밴쿠버, 패션계에서 자리잡기
그렇게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막무가내로 퇴사를 해버리고 난 후, 내겐 ‘뭘 해 먹고살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일단 지쳐있었던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바로 이어서 할 일을 찾기보다는 여행도 다녀오고 여유로운 생활을 지속하며,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을 이 귀중한 시간을 제대로 쉬며 보냈다. 몇 달이 지났지만 다시 취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잘할 수 있는 '마케팅 스페셜리스트'라는 타이틀을 걸고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창 인스타그램을 키우고 있었던 때라 내가 잘할 수 있는 패션 및 마케팅을 전문으로 내세워 나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이용하여 브랜드를 홍보하거나 이벤트에 참여하며 사람들과 네트워킹을 해 나갔다.
활발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덕분인지, 밴쿠버에서 일 년에 두 번씩 열리는 ‘에코 패션위크(Eco Fashion Week)’에서 연락이 왔다. 늘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패션쇼와 다르게 에코 패션위크는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위해 탄생한 패션 행사였다. 밴쿠버의 워터프런트 역에 위치한 페어몬트 호텔(Fairmont Waterfront Hotel)에서 열리는 9번째 에코 패션위크에서, 대형 빈티지 스토어와 협업하여 ‘업사이클링(Upcycling: 창의적으로 재료를 재활용하거나 재사용하는 것)' 스타일링 패션쇼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이 들어왔다.
이 일은 캐나다 최고의 세컨드 샵(Thrift Shop) 브랜드인 ‘밸류 빌리지(Value Village)’에서 500불을 지원받아, 머리부터 발 끝까지 10벌의 의상, 신발 및 액세서리까지 모두 스타일링 해내야 하는 어마어마한 도전이었다. 빈티지를 즐겨 입는 편은 아니었기에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휩싸였지만,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도전에 임했고, ‘서울의 젊고 활기찬 스트릿 스타일'과 ‘테니스'를 접목시킨 컨셉으로 성공적인 패션쇼를 치러낼 수 있었다.
프리랜서로 일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즈음, 우연히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이 닿게 된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곧 밴쿠버에 상륙할 미국의 대형 백화점 ‘노드스트롬(Nordstrom)'에서 채용을 하고 있는데 관심이 있으면 한 번 지원을 해보라는 거였다. 큰 기대 없이 온라인에 지원을 했더니, 바로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면접은 다운타운 콜 하버(Coal Harbour)에 위치한 웨스틴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첫 면접은 신기하게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개스타운의 스타벅스에서 스타일이 좋아서 스트릿 스타일 사진을 찍어 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던, 한국계 캐나다인인 ‘지나(Gina)’였다. 지나와의 인터뷰는 안면이 있어서 인지 친구와 대화하듯 가볍게 지나갔다. 2차 인터뷰는 미국에서 온 ‘브리지(Breezy)’와 진행됐는데, 새빨간 머리카락에 양팔에 문신을 새겼고 스모키 한 메이크업 때문인지 강력한 인상을 가졌지만 허스키한 목소리와 호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쿨한 여성의 전형이었다. 그녀는 내게 3가지의 시추에이션(상황)을 주며 어떻게 코디(Outfitting)를 할 것인지 테스트를 했다. 포에버 21에서 스토어 전체 스타일링을 담당해왔던 나였기에 쉽게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재미난 테스트를 끝내고 나니, 다음은 스토어 매니저 ‘크리스(Chris)’와의 면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내가 본 면접은 노드스트롬 내, '숍 인 숍(Shop in Shop)' 개념으로 4~6주 동안 열었다가 다른 컨셉으로 변하는 팝업(Pop-In) 매장의 판매직을 위한 자리였는데, 이는 시간당 12불에 커미션 조차 없는 일이었다. 오바키 디자인 시절부터 시작해서 나름 패션계에서 갈고닦아 온 나의 경험에 비해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고, 이런 나의 이력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더니 나에게 노드스트롬 ‘스페이스(SPACE)’에서 일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며 제안을 해 왔고, 시애틀 본사에 있는 바이어 및 코디네이터와 함께 화상 인터뷰를 진행한 후, ‘스페이스 앰배서더(SPACE Ambassador)’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노드스트롬에서 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