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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서 May 28. 2024

추억 풍경

꽃무늬 메리야스, 그리고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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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형제도 우리처럼 2남 3녀였다. 장남인 아버지가 시골에서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는 것과 달리 작은아버지는 서울에서 자리를 잡으셨다. 작은아버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작은엄마와 결혼을 했다. 작은엄마는 목소리가 가늘고 톤이 약간 높아서 시골에서 걸걸하고 큰 목소리만 듣던 나에게 매우 신기한 분이셨다. 소녀처럼 감성적인 면도 있어 영화를 좋아하는 서울사람이었다.      


내가 작은엄마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일 년에 서너 번, 할머니 생신, 명절, 여름휴가철 정도였다. 작은엄마가 내려오실 때는 항상 두 손 가득 선물을 챙겨오셨다.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신기한 물건들이 많아 어린 마음에 작은엄마가 내려오시는 걸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되는 여름, 작은엄마는 두 손 가득 선물꾸러미를 들고 오셨다. 내가 그 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난생 처음 끈 달린 메리야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작은엄마가 사 오신 파란색 꽃무늬 메리야스, 쨍하게 파란 다섯 장의 꽃잎, 가운데 노란색 꽃씨가 박혀있던 메리야스는 너무도 신기한 속옷이었다. 1970년 대 시골에서는 여름철에 메리야스를 입을 형편이 못되는 집이 많았고, 메리야스라고 해봐야 땀을 흡수하기 위해 속에 입는 팔이 달린 투박하기 그지없는 속옷일 뿐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우리 형제들이 새 옷을 입을 기회는 명절 때 뿐이었다. 설빔, 추석빔으로 불리던 새 옷은 아이들이 명절을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특히 우리 집은 옷가게에서 옷을 사 입는 일이 극히 드문 일이었다. 같은 동네에 사시는 셋째 종조할머니께서 옷 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종조할머니는 면소재지에서 5일 장이 열리는 날에는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아서 장사를 했고, 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보따리 가득 옷을 머리에 이고 버스가 다니지 않는 동네로 장사를 다니셨다.      


명절 전날 밤이면 종조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셔서 옷 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우리 형제들은 보따리 속에서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옷들을 찾아서 입으면 그것이 추석빔, 설빔이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추석 때 내가 고른 옷은 아래 위 한 벌로 된 빨간색 바지 정장(?)이었다. 소매단과 바지단에 노랑, 초록, 파랑, 흰색의 꽃들이 자수로 박힌 예쁜 옷이었다. 특히 허리에는 얇은 검정색 밸트가 있어 더 맘에 들었던 옷이다.    

  

맞춤이 아니고는 한 벌로 된 옷을 사 입기 힘들었던 시절, 빨강색 추석빔으로 단장하고 아버지가 시장에서 사다주신 검정색 물결무늬에 빨강색 메리안 구두를 신은 추석 아침은 마치 꿈을 꾸는 듯 즐거웠다.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동요처럼 마음도 몸도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명절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꽃 자수가 박힌 옷을 입고, 꽃 모양의 메리야스를 만나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여자아이가 되어갔다. 나는 성격도 털털하지만 동네에서 같이 놀던 아이들도 남자아이들뿐이어서 완전 왈가닥인 선머슴이었다. 동네에는 위아래로 한 살 차이 나이 아이들을 포함해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열 명 넘게 있었는데 내 또래 여자아이가 없었다. 남자아이들 틈에서 공차기를 하든, 자치기를 하던 나는 이겨야 직성이 풀려서 억척스럽게 놀다보니 완전 머슴애 같았다. 남자애들은 나를 ‘꿰미’라고 불렀다. 남자아이들과 놀면서 힘에 부칠 때는 꼬집기도 하고 할퀴기도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별명이 부끄러워서 그때부터 남자아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 후로 언니들을 따라 다니며 공기놀이, 핀치기, 사방치기를 하며 지냈다. 세 살 차이 나는 둘째언니와 친구들을 따라 다니며 그 무리에 끼기 위해 억척스러움을 또 발휘해야 했다. 그 놀이가 무엇이든 이기기 위해, 나이를 극복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언니들이 중학생이 되고, 나는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여자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하교 길에는 운동장 담벼락 나무 아래 그늘을 찾아 공기놀이를 했고, 고무줄놀이를 하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고무줄을 끊는 남자아이들을 가차 없이 응징하며 힘자랑도 했다.     

 

6학년이 되어서는 원피스도 입었다. 언니들은 치마를 입었지만 나는 바지만 입었다. 선머슴처럼 크는 내가 걱정되셨는지 엄마가 처음으로 치마를 사오셨다. 그동안 보지 못한 파격적인 민소매 원피스였다. 어깨에서 겨드랑이에 걸쳐 프릴이 달려 있고 무릎 위를 살짝 올라오는 옅은 노란색에 격자로 하얀색 줄무늬가 있는 원피스였다. 원피를 보는 순간 예뻐서 마음에 쏙 들었다. 예쁘기는 했지만 처음 원피스를 입은 나는 어색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뛰어다닐 수 없었고, 거추장스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했다. 신기한 건 바지를 입을 때보다 원피스가 더 시원하게 느껴져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여름 내내 원피스를 입었다.  

      

원피스를 입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자 다시 바지를 입었다. 햇살 좋던 어느 가을날, 학교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던 나는 청바지의 가랑이에 벌겋게 핏자국이 번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팬티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나에게 뭔가 비밀스런,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는,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일었다. 나는 수돗가로 가서 팬티와 바지를 직접 빨아 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거처럼 행동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가정 시간에 여성의 몸에 대해 배우면서 내가 월경을 시작했다는 걸 알았다. 생리대를 사는 것도 부끄러워서 친구에게 부탁해야 하는, 월경은 언제나 나를 전전긍긍하게 하는 그 무엇이었다. 나는 그렇게 여자아이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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