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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후 Mar 04. 2018

23. 결핍의 표현들

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둘째 아기는 병치레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아기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저는 퇴근 후 기차를 타고 원주에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병원에 도착해보니 저녁 9시이었습니다. 11시까지 아기를 지켜본 저는 막차를 타고 다시 원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이 일에 크게 상심한 듯 보였습니다. 오라고 해서 오고, 와서도 크게 신경을 안 쓰고, 그리고 다시 가버린 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병원에 입원했으니 아기가 큰 탈은 없을 거라고 저는 지레 판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아기 옆을 지키고 있는 덕분에 제가 회사 일에 충실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돈을 벌어서 병원비를 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왜 휴가를 내겠다고 회사에 말 한마디 못했을까요?     


 어느 토요일 비가 오는 날, 저는 피곤을 핑계로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역시 피곤에 지친 아내는 첫째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라고 잠결에 제게 말했습니다. 그냥 계속 잠을 잤던 저는, 그러다가, 깜빡 다시 잠이 들었는가 싶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서 골목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저 멀리 골목길에 장모님이 보였습니다. 어깨와 등줄기의 빗물처럼 골목길 사이사이엔 빗물 고랑이 생겼습니다. 흙탕물이 들어오는 흰 고무신을 신고 오른손엔 우산을 들고 왼 손엔 첫째 아이의 손을 잡고 그리고 그 굽어진 등에다가 둘째 아이를 둘러업고 장모님은 유치원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고 계셨습니다. 저는 달렸습니다. 장모님의 뒷모습을 좇아 달렸습니다. 장모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향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은행에 입사하고 일 년이 지난 후, 저는 경기도 남양주의 진접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서울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20분, 버스를 2번 갈아타고 진접까지 1시간 30분, 다시 은행까지 걸어서 10분. 이렇게 편도 2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버스 정거장이 40개 정도, 마음이 가다 서다 40번 정도…. 당시 학원 선생님을 하던 아내의 차로 출근을 해보니 40분 정도 걸렸습니다. ‘티코’ 같은 차를 하나 뽑는 게 낫다 싶었지만 아내는 반대했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    


 새 지점에서 제가 처음 했던 일은 대출 서류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든 서류가 창고 바닥에 널려져 있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창고에 처박혀서 그 서류들을 정리했습니다. 바닥을 뒤져서 책장에 꼽고, 누가 서류를 요청하면 책장도 뒤지고 바닥도 뒤지고, 이쪽 책장에서 다시 저쪽 책장으로 옮기고….  

소문에 따르면 무분별한 대출로 문제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대출을 잘 해준 사람은 좋은 실적을 챙겨 자리를 옮기고 후임은 수습을 못해서 감사를 받고. 그때는 괜찮았고 지금은 문제고... 실적이 안 좋으니 다 안 좋았습니다. 합병의 여파인지 직원들 체육대회도 따로 하고, 학맥에 따른 파벌도 있었습니다. 결재 라인에 문제가 있어서 선배 과장님께 ‘규정과 다릅니다’라고 어렵게 한마디 했다가 아래위로 시선 스캔을 당하는 등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쌓여갔습니다.    


 힘든 직장 생활에 가정에도 여파가 왔습니다. 서로가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던 저와 아내는 가난의 기억으로 경쟁을 하곤 했습니다.

"내가 어릴  샤파 연필깎이 – 그 기차 장난감 같은 것이 없어서 도루코 면도칼로 연필을 깎았어."

아내는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 엄마가 낫으로 연필을 깎아주셨어.”    


 그런 가난의 기억 때문인지 아내는 무척이나 현실적이었습니다. 제가 아직 학생인 사촌 동생에게 가끔 용돈을 쥐어 주는 것에도 근심이 차올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장애를 가진 아이라서 맘이 더 간다고 해도 아내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형님, 그러니까 아내의 오빠도 장애인이었습니다. 장애인이라고 용돈을 더 줄 이유는 없었습니다. 무조건 아껴야 했습니다.


아직 어리기만 한 아이들의 입시를 주제로 웃자고 하는 에피소드에도 차가운 세상의 명암이 그대로 투영되었습니다.  

 “내가 대학교 때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남학생이 있었어. 어느 날 학교 앞에서 꽃을 들고 나에게 대시를 하는데, 나는 최소 OO대 아니면 안 만난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 남학생 눈에서 닭 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야. 그 장면이 잊히지가 않네. 그때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벌로 당신을 만난 거 같아.”     

 더 좋은 대학이 더 좋은 직장과 경제력, 혼사 그리고 노후를 약속한다는 말은 더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사람들에겐 ‘진리’인 것 같습니다. 은행 2년 차인 제 벌이가 넉넉한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지만 농담처럼 던진 말은 속 좁은 제겐 상처가 되었습니다. 

 

 안팎의 스트레스에 제 마음의 상흔이 쌓인 탓인지 저는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스스로를 합리화시켰지만 철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제 나이나 제가 겪은 세상 경험으로 볼 때 저의 계절은 여전히 ‘미숙한 봄’이었고, 고생을 하거나 진정 땀 흘려 본 ‘여름’은 아직 없었으니까요. 여름 한 철을 지나면 과연 사람이라는 게 철이 드는 것인지…. 이런 봄날 같은 고민도 잠시, 퇴사라는 현실이 닥쳐왔습니다. 모든 게 좋으면 영화 속 이야기처럼 '박하사탕' 하나도 최고로 맛있겠지요. 그러나 폭주하는 기차 같은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그렇게 초여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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