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주택에서 산다는 것_희망편 1) 로망 부자의 버킷리스트
사실 주택에서의 삶에 로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흔히 한 번쯤 생각하는 ‘나이 들면 공기 좋은 한적한 곳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아야지’ 같은 류의 막연한 바람도 없는 쪽이었다. 아파트 생활의 단점을 느끼면서도, 여러 장점들에 그럭저럭 만족스러워하면서 살았다. 주택도 사람 사는 곳인데 어떤 점은 좋고 어떤 점은 나쁘겠지, 어린 시절 겪었던 것들을 돌이켜 보며 이사를 할 마음의 준비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나와 달랐다. 아파트에서 사는 2년 간 마치 물 밖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뭔가에 목말라 보였고, 나중에 본가 동네에 집을 짓고 살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마침내 주택으로 이사를 하고서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가 됐다.
시작은 그릴이었다. 바비큐 그릴을 사겠다며 밤늦게까지 빨개진 눈으로 핸드폰을 들여다 보기에 적당한 걸로 사고 얼른 자라고 했는데, 며칠 안되어 그랜드가든이라는 요란한 이름의 거대한 그릴이 집으로 배송됐다. 펜션에 가면 흔히 있는 동그란 모양의 귀여운 그릴이 아니고, 튼튼한 네 다리에 양쪽으로 날개 같은 것이 달리고 고기를 올려 놓는 부분도 2단으로 되어 있는 본격적인 놈이었다. 나름 가성비 좋은 국산 제품으로 산 거라 20만원쯤 줬다나.
불이 벌겋게 붙은 숯과 참나무 장작과 고기를 넣고 뚜껑을 덮어 놓으면, 안에 갇힌 열기에 고기가 타지 않고 천천히 익었다. 그는 뚜껑과 몸통 틈새로 연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가성비 제품이라 훈제가 제대로 안 될 것 같다며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제법 만족하는 눈치였다.
가정집에서 꼭 고기를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해 구워야 하나 싶었던 나조차, 수육처럼 부드럽게 익어서 숯불향을 풍기는 고기를 맛보니 돈 값을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족들과 간단한 집들이를 할 때나,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도 거대한 그릴이 분위기를 톡톡히 살리며 제 역할을 했다. 통삼겹이나 목살은 물론, 바비큐 소스를 발라 구운 폭립, 새우까지 바비큐 메뉴도 다양해졌다.
우리 둘 뿐인 날에는 그랜드가든을 넣어두고, 1~2인용 작은 그릴에 불을 지피거나 버너에 불판을 올려 마당에서 단촐한 ‘외식’을 즐기곤 한다. 여름이 지날수록 이 외식에 한 가지 애로사항이 생겼는데, 해가 빨리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저녁 식사를 하기에 조금 어두워졌다는 것이었다.
즐거운 마당 라이프가 방해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님 주택살이의 ‘갬성’을 찾고 싶었던 것인지, 그가 이번에는 펜션이나 카페 마당에 달려 있는 알 전구를 달겠다며 사부작거리기 시작했다. 기성품으로 나온 제품은 비싸다며 철물점에서 전기선과 전구 소켓을 사다가 이어 달아 직접 만들어 걸었다. 11W짜리 노브랜드 LED 전구를 끼우니 멀리서도 우리 집이 훤히 보일 정도로 밝았다. (전구가 생각보다 비싸다고 고민하는 걸 부추겨 사게하길 잘했지.)
참 정성도 이런 정성이 없고 부지런도 이런 부지런이 없다. 하루는 굴러다니는 목재로 평상을 만들어서 그늘에다 놓고 유자랑 낮잠을 자고, 하루는 잔디를 말끔히 깎아 정돈하고 물을 주고 마당에 제멋대로 심긴 나무를 줄 맞춰 옮겨 놓는다.
또 어느 날에는 아궁이에 솥뚜껑을 올려 고기를 구워 먹고 싶다면서, 어디서 뻘겋게 녹이 슨 솥뚜껑을 주워와서는 내내 닦아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게 만들어 놓았다. 조만간 기름 쪽 빠져 담백하고 맛있는 삼겹살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꼭 뭘 하지 않는 날이더라도, 어제는 마당에 나와있던 캠핑 의자가 오늘은 테라스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 본인 만의 방식대로 집과 그 주변을 한껏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캠핑을 가지 않아도 언제나 불멍을 즐길 수 있는 게 마당 있는 집의 장점 중 하나라는데, 나는 모닥불 대신 집에서 뭔가를 만들고 심고 고치고 옮기고 정리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남편을 보며 흐뭇하게 멍 때리는 재미에 빠져있다. 내가 하는 일은 구워 주는 고기나 맛있게 먹고, 잔디 깎고 난 이파리나 갈퀴로 긁어 모아다 버려주는 정도다. 저 로망 부자의 다음 로망은 뭘까, 그 버킷리스트에 뭐가 있나 좀 궁금하기는 하다.
아, 20만원짜리 그릴이나 눈부신 알 전구에 비해서는 소박하지만, 내 로망도 한 가지 이뤄졌다. 2층 집으로 이사를 한 덕에 유자와 잠자는 공간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게 되면서, 오랜 로망이었던 새하얀 호텔식 침구로 이불을 바꿨다!
해가 좋은 날이면 테라스에 나가 이불이며 베개를 힘껏 털고-아파트에서는 아랫집에 민폐가 될까 봐 창 밖으로 먼지를 털지 못했었으니까- 햇빛을 잔뜩 받게 널어 둔다. 가까운 카페나 오름이나 바닷가를 다녀와서 이불을 거둬들이면, 바삭바삭하게 마른 하얀 이불 사이로 햇살 냄새가 고소하게 느껴진다. 행복감에 가슴이 부푸는 순간이랄까. 뭐든 하나라도 확실히 좋은 점이 있으니 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