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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Oct 30. 2022

초심자의 행운

운동을 시작한 지(구력) 67일.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PAR3 전용 골프장으로 갔다. 날씨가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한낮은 아직 여름이었다. 패션은 원래 계절을 앞서 가지 않던가. 매장에서 추천받아서 산 상의는 하이넥 니트였다. 에어컨을 켠 실내연습장에서만 연습하던 나는 볕 좋은 날 실외 골프장의 더위는 알지 못했다. 새로 산 옷을 입고 새 골프화를 신고 평소보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뛸 뿐이었다. 남편과 함께 운동을 가는 동안 친정 부모님이 아이들을 봐주시겠다며 집으로 오셨다. 추석 명절이라 평소보다 차가 막혀서 예상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셨다. 부모님을 기다리느라 출발이 늦어져서 함께 하기로 한 동반자들은 이미 도착해있었다. 부부 3쌍은 두 팀으로 나눠서 게임을 시작하기로 했다. 성인 여섯이 원을 그리듯 서서 한 손을 내밀었다. "뒤집어라 엎어라" 손등을 내민 팀과 손바닥을 내민 팀으로 나뉘었다. 우연히도 부부가 같은 팀이 된 경우는 없었다. 나는 6명 중 구력이 가장 짧았다. 욕심도 뭘 좀 알아야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평소에 입지 않는 짧은 치마도 입은 김에 초록 잔디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이나 남겨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동반자들은 매 순간 초보자를 배려했다. 본인의 경험에서 얻은 여러 팁들을 속성으로 알려주었다. 앞팀과 뒷팀의 경기 상황을 파악하고 공을 쳐야 할 타이밍을 파악해서 알려주었다. 나는 그저 공을 치라고 할 때 스윙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7번 아이언이 공의 정확한 위치를 때리는 순간 나는 소리. 딱과 땅 그 사이 어디쯤, 뭔가가 깨부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 그리고 동반자들의 한껏 격양된 응원의 소리. "나이스" 흔히들 낚시를 하며 물고기가 미끼를 물면 낚싯줄을 감아올릴 때 손맛을 느낀다고 한다. 나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높고 뜨고 멀리 나가는 공을 쳤을 때 아이언 헤드에서 시작되어 샤프트를 타고 그립을 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진동의 감각이 좋았다. 실내 연습장에서 공을 스크린 날려 보낼 때와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한번 재미를 느끼니 다음번 홀에선 더 공에 집중하게 되었다. 선순환이었다. 더운 날씨도 모기에게 내 피를 나눠주는 것도 괜찮았다. 지금 서 있는 곳이 몇 번째 홀인지 모른 채 정신없이 9홀을 돌았다. 전반이 끝났으니 잠깐 휴식을 취했다. 시원한 물과 커피를 마셨다. 초보자를 계속해서 신경 쓰고 챙겨야 했던 동반자들은 나보다 더 지쳐 보였다.


공을 잘 맞출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날아가는 공을 보며 내가 손맛을 느끼게 될 줄도 상상도 못 했다. 운동을 하면서 내가 재미를 느끼다니 세상에! 이런 게 초심자의 행운인가 싶었다.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신경 쓰이는 것이 없었다. 연습장에서 연습하던 대로 하나의 동작만 반복했으니 아무 생각 없이 공에 집중해서 몸에 베인 습관으로 공을 쳤을 뿐인데 연습장에서 느꼈던 회의와 번뇌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나 알고 보면 실전에 강한 편일까? 용기가 차오른 김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에게 제안했다. 내일도 친정부모님이 집에 계실 예정이니까, 아이들이 잠들면 둘이 나가서 스크린 골프를 쳐보자고. 이렇게 재밌는 걸 그동안 나 빼고 하고 있었구나. 집으로 돌아와서도 흥분된 상태로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남편이 찍어준 영상을 보고 또 보며 SNS에 올린 사진과 영상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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