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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Sep 20. 2022

길냥이는 노숙을 택할까? 하숙을 택할까?

자유로운 영혼의 마스코트 길냥이


 언제부터인가 길냥이들의 사교장소로 우리 집도 선택된 듯하다.

올해는 하루도 거름 없이 아이들이 다녀가는 명소? 가 되고 말았다.

초봄에 왔던 사교성 좋았던 아이 "귀여미"는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며 애교를 부렸는데,

저녁이 돼도 가지 않아 가라고 뭐라 했더니,

그 길로 나가선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서운했던 마음을 두 편의 글로 표현해보기도 했다.

고양이를 좋아하긴 했어도 고양이에 대한 정서는 부족했던 내게 고양이의 성격과 특성을 잘 가르쳐준 아이였다.


귀여웠지만, 너무나 소심해서 다시는 오지 않은 "귀여미"


여름 접어들며 "노랑이"가 한동안 들락거렸다. 녀석은 보기에도 동네를 재패할 듯 기개가 있었는데,  밥을 주며 가까이서 보 콧등에 상처가 많았다.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다닌 건지 자기 영역을 지키느라 그랬는지 삶의 고달픔을 얼굴로 보여준 아이였다. 넉살 좋게 현관 앞에서 야옹거리며 "더 달라"라고 요구도 한 아이였다. 그랬는데, 한동안 밥 먹고 쉬다 가더니 어느 날부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보다 센 녀석에게 크게 당한 것은 아닌지 내심 걱정도 하게 만든.

노숙의 생활이 어디 만만하랴마는 그래도 녀석은 넉살 좋아 잘 견디고 즐기며 살기를 바랐는데...

한참 지난 후 강아지들 산책시키다 집에서 좀 떨어진 이웃집의 차 밑에서 쉬고 있는 녀석을 만났다.

물론 녀석이 반가워한 것아니고 내가 반가워했다. 콧등의 상처를 보고 집에 들락거리던 아이인 줄 알았다. 터를 다른 곳으로 옮긴 건가 보다 생각하고 안심했다. 한번 그렇게 얼굴 보이곤 그 후론 다시 만나지 못했다.


듬직하고 뻔뻔했던 "노랑이"


사실 이 아이들보다 예전부터 간헐적으로 들락거리던 녀석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내키면 드나드는 점박이(코 옆에 검은 점이 있다)다. 어쩌면 점박이가 처음 우리 집을 방문했었던 귀여미에게 경계심을 느끼고 못 오도록 한 것이 아니었을까는 생각도 들었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제 입맛에 맞는 사료를 주는 곳이 있으면 그곳을 더 찾아다녔는지도 모르겠고, 우리 집은 여러 아이들이 다양하게 방문하는 곳이라 경계심을 가지고 관찰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항상 말미를 남겨뒀던 곳이 우리 집이었는지도 모른다.


귀여미는 삐져 상처받아 갔고, 노랑이도 오지 않는데 점박이와 더불어 요즘 우리 집을 드나드는 아이는 점박이 새끼, 까미다. 아니 새끼가 아니라 이제 자립한 까미다. 이아이들은 작년 겨울에도 돌담 사이로 가끔씩 야옹거려 먹이를 몇 번씩 돌 위로 올려 주곤 했다. 워낙 경계를 많이 해서 돌담을 내려오지 않았던 녀석들이었는데 올해는 평정을 했는지, 먹이 주는 사람의 성격을 파악했는지 데크에 앉아 야옹거리며 밥 달라고도 한다.


점박이는 까칠해도 배짱은 좋아 꾸준히 온다. 식사 후에 데크에서 쉬고 놀기도 한다.


두 아이들은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 아침에 먹고 가선 저녁에도 온다. 차라리 시간 간격을 두고 오면 좋은데 어느 날은 같이 온다. 밥을 주면 어미 점박이는 까미 밥을 향해 오고 새끼 까미는 "하악"거린다.

"아니 이 녀석들이?"

"밥을 꼬박 챙겨주는데 어디서 "하악"거려?"

야단을 치면 움찔하다가는 밥그릇을 두 개 놔도 어미 점박이는 새끼 것을 넘본다. 할 수 없이 까미 밥을 먼저 주고 점박이를 새끼 옆으로 못 가게 야단을 친다. 한쪽 구석에서 말귀라도 알아들었는지, 쭈그리고 앉아있다. 까미가 밥을 먹고 나서 어미에게 밥을 준다. 이번엔 새끼 까미가 욕심을 낸다.

"이제 그만 나가 놀아, 너도 먹을 만큼 먹었잖아"

까미는 움찔하다가는 돌담으로 올라간다.


며칠 전부터는 어미는 오지 않고 까미만 온다. 엊그제 야단맞은 것이 마음의 상처가 되었나?

그래도 점박이는 당당하고  뻔뻔해서 제가 필요하면 다시 올 것이다.

이전에는 저녁에 한번 밥을 놓았는데, 아침에도 밥 달라고 야옹거리니, 오는 손님 내쫓지 않고 가는 손님 붙들지 않는 내 철학에 따라올 때마다 밥을 챙겨준다.


우리 동네는 길냥이많은 편이고, 밥을 챙겨주는 집도 많다. 아랫동네 친구도 밥을 챙겨주는데, 이 아이들은 작년 겨울 그 집 창고에서 새끼까지 낳고 새끼들과 아침마다 밥 먹으러 올라온다고 한다. 어린 냥이들을 살뜰히 챙기는 어미 냥이의 모성애가 너무 예뻤다. 우리 집에 오는 점박이와 까미가 비교되다가, "그래 어쩌면 아직 아기라 그렇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엔 점박이도 까미를 꼭 데리고 다녔으니... 어쩌면 지금은 사이좋은 저 아이들도 자립할 때가 되면 어미가 내보낼 수도 있겠지.


고양이는 자유로운 영혼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가 아닐까.

처한 환경의 지배를 필연적으로 받고 살 수밖에 없는,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숨통을 틔어주는 존재라고 하면 무리일까... 고양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면 길거리 노숙(露宿)을 택할까? 주인에게 사랑과 재롱의 하숙비를 내고 하숙(下宿)할 집안을 택할까?

우리 집을 드나드는 아이들의 밥 먹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씩 자문해 본다.

답이야 때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에 하나든 두 개든 받으면 줘야 한다는 선한 명분에 익숙한 이들이나 거저 받아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움켜쥐고 챙기는 명분에 익숙한 이들이든,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삶의 태도나 방식에 대해선 이 아이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본성이 향하는 대로 "나는 배고프니 먹고, 너는 줘야 마음이 편하니 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감정도 던져주지 않으며, 매일이 같은 일상의 반복이라도 늘 처음 맞이하듯"야옹"거리며 제 난바대로 살 것이다.


"자유"는 좌우상하를 둘러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다. 자연은 스스로를 먼저 받아들인 후에 내보낼 수 있는 여유를 길냥이들을 통해서도 가르쳐 준다. 오늘 아침도 배부르게 먹고 간 까미는 제 원하는 대로 어디선가 머무르며 하루를 감상하다가 어스름 저녁이면 "밥 한 끼 주세요" 하며 들를 것이다.



두 녀석이 함께 오면 동시에 식사할 수가 없다. 까미 밥 먹는 동안 점박이는 기다리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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