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벽, 뒷산을 산책하는 시골 사는 웰피츠 일기
나는 전 가을이다.
우리 아빠가 전 씨라는 보장은 없다.
나의 부친이 스피츠일 거라고 추측된다 하니 스가을이 되어야 하는데 뜬금없이 전 가을이란다.
어떤 인간들은 날 보고 웰피츠라고 부른다.
큰 집사 아들이 전 씨라서 내가 전 가을이란다.
나는 스씨여? 웰씨여? 아님 전 씨여?
우리 엄마는 김 땅콩이다.
원래 엄마 성하고 자식 성은 다른 법이니 이해한다.
그런데 큰 집사가 만날 자기가 엄마라고 한다.
우리 엄마한테도 엄마고 나한테도 엄마면 할머니 엄마야? 엄마 할머니야?
어쨌든 나는 엄마가 둘이다.
송 씨랑 김 씨랑.…….
생각해 보니 송 씨 엄마는 계모인 게 확실하다.
그리고 나에게는 무서운 오빠집사가 하나 있는데, 원래 콩엄마의 아빠였다고 하니 나한테는 외할아버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오빠로 바뀌더니, 삼촌이 된 무지 헷갈리는 사람이다.
이 삼촌은 쫌 무섭다.
아니 많이 무섭다.
그 앞에만 서면 저절로 꼬리가 확 내려간다.
헷갈리는 우리 집 족보를 어디 물어볼라고. 손들고 질문해도 가문의 비밀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집사들이 평소에는 “가을아~~ 가을아~~” 이렇게 부르다가
내가 숲으로 달아난다거나
고라니 똥을 좀 주워 먹을라치면
‘전 가을, 전 가을 안 돼!’ 이런다.
그래서 성이란 것이 집사들이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할 때, 이름 앞에 붙이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성이란 참 나쁜 거구나.
오늘의 다짐:
집사들 말을 잘 들어서 ‘전 가을’로 불리지 않겠다.
# 에필로그
개고기를 먹는 한국문화를 비난하며 개를 가족처럼 여긴다는 서구인들도 개에게 ‘엄마’, ‘아빠’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처음 땅콩이를 데려와 나에게 땅콩이 할머니라고 강요하는 아들의 말에 기겁을 했다.
가까이 살면서 콩, 가을이와 매일 함께 산책하는 언니가 스스로 콩, 가을이 엄마라고 말했을 때도 화들짝 놀랐다.
콩, 가을이와 교감하고 마음과 감정이 보이면서도 '엄마. 아빠'와 같은 호칭은 아직도 어색하다.
아무리 기를 써도 개가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그네들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마음은 가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살아있는 날까지 책임질 것이지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변화한 현대사회의 가족 안에 개가 확실히 가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혈연이 중시되던 농경문화의 오랜 역사가 친해지면 다 언니 오빠로 가족화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테지만 나는 아직 개엄마로 불리는 것은 어색하다.
변명 같지만 콩이와 가을이를 아들보다 조금이라도 덜 사랑해서는 아니다.
집집마다 개엄마가 되면서 족보가 꼬이는 현상이 나타나 가을이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매번 새로운 친척이 방문할 때마다 꼬인 족보를 풀어보느라 머리가 아프다.
내가 여기서 이걸 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