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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Feb 23. 2019

질문 열여덟: 한국에 왜 돌아왔어요?

치매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

치매는 80 퍼센트 이상이 평소 습관에서 나오는 습관병이며 
젊었을 때부터 규칙적으로 건강한 생활 습관, 식습관, 긍정적인 생활 태도 및 꾸준한 운동을 유지하면 치매에 걸리는 걸 예방할 수 있다. 
또 걸리더라도 이른바 ‘예쁜 치매’가 될 수 있다.


미루는 아버지의 첫 손녀다.


읽고 있는 치매 책의 골자는 이랬다. 

사뭇 뻔하고 교과서적이지만 가슴에 비수를 꽂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시부모님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시부모님은 ‘좋은 생활 습관’의 정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잔잔한 파도 같지만 꽉 찬 시부모님의 일상


전직 의사시며 네덜란드 남쪽 브라반트(Brabant)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계시는 올해 68세의 시아버지께선 나에게 항상 이걸 강조하셨다. 


청결한 생활, 휴식하는 생활, 규칙적인 생활. 


은퇴 후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시는 시부모님의 일상은 다음과 같다. 

아침 8시 반쯤 일어나 샤워를 하시고 9시 반쯤 아침을 드신다. 아침은 항상 빵, 구운 달걀, 오렌지 주스와 티다. 아침 후 클래식 라디오를 배경으로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보시며 마지막에 꼭 같이 신문에 있는 가로 세로 낮말 맞추기를 푸신다. ‘내가 먼저 끝냈다!’며 시어머니를 약 올리는 시아버지의 표정이 재미있다. 그때가 약 11시 반쯤이고 그 후 각자 일을 하신다. 

시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당신의 목공 작업실에서 가구를 만드시고 (제법 멋진 작업실이다. 또 시아버지의 목공 실력은 가히 수준급이다.) 시어머니는 성가대 노래 연습, 재봉질, 베이킹, 정원 가꾸기 등 여러 일을 하신다. 점심은 따로 안 드시고 4시쯤 간단히 빵과 차를 드신다. 부엌 권한이 전적으로 시아버지께 있는데, 그래서 저녁은 항상 시아버지께서 만드신다. (그래서 카밀과 난 감히 요리할 엄두를 못 낸다.) 오후 5시쯤 작업실 정리 후 요리를 하시는데 대강 10개 정도의 메뉴를 돌아가며 만드신다. 화요일엔 파스타, 금요일엔 생선, 토요일엔 빵, 이런 식이다. 시아버지의 요리 솜씨는 꽤 좋다. (이 분은 딱히 못하시는 게 없는 것 같다.) 7시쯤 저녁을 먹고 (같은 요리인데도 오늘은 무슨 재료를 썼네, 레시피를 이렇게 바꿨네, 하시고 그러면 어머나 그러냐, 어쩐지 맛이 다르더라, 뭐 이런 소소한 얘기가 오간다. 난 그냥 속으로 웃는다. 내 입엔 다 똑같은데 뭘 그리 호들갑인지.) 8시에 20분짜리 티브이 뉴스를 꼭 챙겨 보시는데 이땐 쥐새끼 소리 하나 안 날 정도로 조용해야 한다. 이후엔 책을 읽거나 티브이 영화를 보거나 이메일을 확인하는 걸로 하루를 마감하고 시어머니는 10시쯤, 시아버지는 12시쯤 집 전체 안전 점검을 하신 후 주무신다. 한 편의 지루한 단편 소설 같다. 


주중 계획도 확실하다. 

시아버지는 2주에 한 번씩 화요일에 자원봉사를 가시고 수요일엔 친구분들과 자전거 마라톤을 하며 매주 금요일 저녁엔 배드민턴을 치신다. 시어머니는 화요일엔 성가대 연습을, 목요일 아침엔 그림 수업을 받으신다. 숲이 바로 뒤에 있어서 산책도 자주 하시고, 일요일엔 최소 6킬로 정도 자전거를 타신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모두 자전거를 탄다.) 이러면 정말 일주일이 기다릴 세 없다는 듯 휙 가버린다. 

담배는 안 피우시고 술은 저녁 상에 와인 한 잔 즐기는 정도며 끊임없이 움직이신다. 누구에겐 지루할, 파장의 폭이 좁은 파도와 같은 생활이지만 모든 면에 여유가 있으면서도 하루를 알차게 쓴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건 마음도 마음이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바탕이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평생 열심히 일하셨고 그걸 연금에 부으셨으며 그 대가로 노후에 편하게 사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안정적인 네덜란드 복지 시스템과도 연결되어 있다.



# 반면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와 지켜보는 아버지의 생활은 시부모님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80세이신 아버지는 규칙성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술과 담배를 즐기셨고,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 및 스케줄이 들쭉날쭉 이었으며, 항상 책을 끼고 계셨지만 달리 몸을 움직이지는 않으셨고, 마작이나 바둑, 가끔 골프를 치시는 것 외엔 달리 취미가 없었다. 부엌엔 발 들인 적 없으며 전구 한 번 갈아보지 않을 정도로 집안일엔 무관심이셨다. (사실 이 시대 거의 모든 한국 아버지들이 그랬을 것이다.) 친구 만나는 걸 좋아하셨고 호탕한 성격으로 인기가 많으셔서 우리 집과 사무실은 항상 아버지 친구분들로 왁자지껄했다. 거의 매일 밤 서재에서 시끌벅적 마작을 두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다. 가세가 기운 후엔 조금 달라지셨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성향과 성격은 달라지지 않았다. 


치매 예방의 첫째 조건이 규칙적이고 건강한 생활 습관이라고 봤을 때, 시아버지의 점수는 상위권이고 아버지는 하위권에 가깝다.

문화, 환경, 인생관이 전혀 다른 아버지와 시아버지를 비교하는 건 무리일 거다. 하지만 두 분을 보며 나 자신을 반추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이른바 그냥 ‘꼴리는’대로 자유롭게 살던 나.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노안이 벌써 왔다고 투덜거리는 나이가 된 지금, 새삼 두 분의 모습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나이가 되었을 때 과연 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에게서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모습을 본다. 


미루야, 넌 아빠를 얼마나 아니?


# 더 늦기 전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왔던 이유는 80퍼센트 이상이 아버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왔다고 한들 내가 아버지께 뭘 해드릴 수 있었을까? 치매로 인해 시나브로 변해가는 아버지를 보며 난 아버지를 얼마나 알고 있나 자문했다. 성인이 된 후 아버지와 진지한 인생 토론을 해 봤던가? 아버지와 같이 뭘 해 본 적이, 하다못해 둘이서 외식이라도 한 적이 있던가? 아버지는 아버지 인생을 사시느라, 나는 내 인생을 사느라 바빴고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데 어색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에 대한 내 정서는 어린 시절 주문진에서 바다 낚싯대를 내 손에 쥐어주셨던 그때에 멈춘듯하다. 어찌 보면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너무나도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와 자식’ 관계 일지도 모르겠다. 


미루의 성장에는 집착하듯 기록하면서도 부모님에 대해선 기록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미 많이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아버지를 알고 싶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결국 아버지의 모습은 미래의 내 모습이니까. 그래야 다시 떠나는 내 발걸음이 조금이나마 덜 무거울 것 같다.        


시나브로 변하시는 아버지를 목격하는 기분은 좋지 않다.


All photos by Yellow 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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