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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Mar 22. 2019

질문 열일곱: 아이가 몇 개 국어 해요?

나 한때 6개 국어 했던 여자야!


6개 국어! 아이고, 복잡해...


# 다문화 가족의 큰 숙제


다문화 가족에겐 피할 수 없는 숙제가 있다. 바로 아이의 이중 혹은 다중언어다. 엄마 언어와 아빠 언어가 다르니 시작부터 언어가 두 개고, 또 가족 내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사는 곳의 언어, 혹은 또래 집단의 언어가 다를 경우 삼중, 사중으로 늘어나기도 한다. 그걸 어떻게 아이가 혼란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느냐는 모든 다문화 가족 부모의 당면 과제다. 많은 다문화 가족이 엄마, 아빠가 자신의 모국어로 아이와 소통하는 OPOL (One Person, One Language) 방법을 사용한다. 쉽게 말해 나는 미루에게 한국어로만, 카밀은 네덜란드어로만 소통하는 식이다. 우리도 미루가 어렸을 때부터 이 방법을 유지했고, 그래서 우리의 밥상엔 항상 여러 언어가 정신없이 오갔다. 

대부분의 다중 언어 아이들은 말이 느리다. 하나도 벅찬데 2, 3개를 동시에 작동시키니 느린 건 당연하다. 어쩔 땐 5살 넘게까지 말이 트이지 않아 부모가 달달 마음을 졸일 때도 있는데 인터넷에 있는 많은 다중 언어 포럼에서 이런 하소연을 하는 부모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책 좀 읽을까, 미루야?


# 미루의 언어 역사 


미루는 처음부터 3개의 언어에 노출되었다. 한국어, 네덜란드어, 그리고 카밀과 내가 소통하는 영어. 미루 역시 느린 발달을 보였지만 난 환경이 특수하니 당연한 거라 생각하고 크게 개의치 않았다. 미루가 마마카라바나란 여행 공연 프로젝트를 했던 29개월 땐 한국어, 네덜란드어, 영어, 포르투갈어, 독일어, 체코어, 이렇게 6개 국어에 노출되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언어는 역시 또래 친구와 놀 때 가장 빨리 배우는 것 같다. 마마카라바나 동안 미루는 항상 같이 여행했던 또래 친구 올리비아와 레오와 붙어있었는데, 자연스레 그들이 하는 언어(독일어, 포르투갈어, 체코어)를 따라 했고 심지어 평소 하던 한국어도 다른 언어로 바꿔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변천사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엔 ‘엄마’, 다음엔 네덜란드어로 ‘마마’, 얼마 안 가 포르투갈어로 ‘마이’라 하더니 나중엔 체코어인 ‘마밍꼬’에 정착했다. 물도 포르투갈어로 ‘아구아(agua)’ 하더니 체코어로 ‘보다(voda)’, 부정어는 포르투갈어로 ‘나오(nao)’ 하더니 독어로 ‘나인(nein)’하다가 영어로 ‘노(no)’라 했다. 창문 열어달라고 할 땐 영어로 ‘오픈(open)’, 내려가겠다고 할 땐 포르투갈어로 ‘샤오 (바닥이란 뜻)’, 뭔가를 원할 땐 한국어로 ‘이거’, 예쁜 걸 보면 네덜란드어로 ‘모이’, 식사하기 전엔 독어로 ‘구튼 아프팉!’, 아플 땐 포르투갈어로 ‘도이도이’. 아이고, 이렇게 뒤죽박죽 된 세상이라니! 도대체 29개월 미루 머릿속엔 뭐가 들어있었을까? 이거 이래도 괜찮은 건가?


곤욕스러웠던 건 내가 포르투갈어, 독어, 체코어를 모르다 보니 미루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었다. 시소를 타고 노는데 미루가 샤오, 샤오, 하길래 평소 하는 외계어일 거라 생각했는데 친구가 샤오는 바닥이란 뜻이라며 미루가 내려가고 싶은가 보다고 옆구리를 꾹 찔렀다. 또 접시 하나를 다 비운 후 메어! 메어! 하길래 무슨 뜻인가 머리 굴리고 있는데 역시 친구가 메어는 독어로 ‘더(more)’란 뜻이라고 얘기해줬다. 

결국 무식이 죄구나. 미루야, 이 무식한 엄마를 용서해다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젠가 정착을 하게 되면 그 나라 언어를 반드시 마스터하겠다고. 


미루에게 문자는 아직 쓰는 게 아닌 그리는 것이다.


솔직히 미루의 언어 발달이 어떤 상황인지 당시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또래에 비해 느린 건 확실했으나 올리비아와 레오 역시 다중언어 아이였기 때문에 달리 비교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고 믿는 난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고 달리 걱정은 안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미안했다. 별난 부모를 만난 탓에 진득하게 한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해서. 그 작은 뇌 속에 얼마나 많은 단어와 문장들이 팽팽 돌아갈까 짠해서. 친구들은 농담처럼 커서 20개 국어를 하는 언어 천재 되는 거 아니냐 했지만, 하나라도 확실하게 잘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어떤 아이는 특정 언어를 거부하거나 말하기 자체를 거부한다던데, 다행히 미루는 그런 모습은 없었고 주변의 언어를 자연스레 흡수하는 듯했다. 


  

# 아이의 말은 꽃이다.


한국 나이로 7살인 현재, 미루는 한국어, 네덜란드어, 영어를 말할 줄 안다. (물론 그때 썼던 포르투갈어, 체코어, 독어 단어들은 모두 잊어버렸다) 아무래도 한국에 있고 어린이집에 다니다 보니 한국어를 더 잘한다. 그래도 카밀이 워낙 수다쟁이에 아이와 대화하는 걸 좋아해서 네덜란드어도 잘 되는 편이다. 영어는 카밀과 내가 말하는 걸 계속 듣고 집에 오는 외국인 손님들과 자주 소통해서인지 제법 잘한다. 셋 다 모두 뛰어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쳐지는 것도 아니다. 서두르지 않고 아이의 리듬에 따라가면 될 거라 믿는다. 만약 다른 나라로 이주할 경우 현지어도 천천히 기다리며 중심을 잡아주는 게 관건이겠다. 아이는 스펀지와 같으니까. 오히려 내가 허덕이겠지. 

 

아이의 말은 꽃이다. 아이의 말은 금이다. 하루하루 전혀 예상치 않은 말을 툭툭 내뱉을 때마다 그 말의 매력에 빠져버린다. 여과라곤 전혀 없이 상황에 대해 너무나 적확하게 팩트 폭격을 날릴 때는 그렇게 웃길 수가 없다. 점점 늘어가는 미루의 어록을 기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언어가 이렇게 아름다운 거구나, 아이를 통해 배운다. 

미루가 여러 언어를 통해 사고의 유연성을 넓히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익히길 바란다. 예전엔 다중 언어가 아이에게 혼돈을 준다는 생각에 꺼려왔지만, 오히려 세상을 더 깊게 보고 복합적인 인지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에 이런 기회를 얻은 미루가 운이 좋다고 믿는다.


난 천천히 기다릴게. 널 믿어.



사족 1. 

가만 보면 유럽에 있을 때 누구 하나 미루의 언어가 느리다고 뭐라 한 적은 없던 것 같다. 말 빠른 거에 민감한 건 우리나라만 그런 건가? 왜 그리 다들 빠르지 못해 안달일까? 기저귀도 빨리 떼어야 하고, 걷는 것도 빨라야 하고, 글도 빨리 읽어야 한다. 기저귀 떼기에 경쟁할 게 뭐가 있다고, 마치 큰 문제가 있는 양 호들갑을 떤다. 

나이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어찌 생각하면 소름 끼치는 일이다. 아이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니까. 언어 외 모든 게 조금씩 느렸던 미루지만 지금은 여느 아이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제 아빠를 똑 닮아서 너무 말이 많아 탈이니, 느렸던 게 다행이었다. 지금도 두 사람의 수다를 견디기 어려운데, 더 일찍이었다면… 어이쿠,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사족 2. 

미루의 어린이집에서 매일 받아쓰기를 한다. 집에 오면 꼭 가방에 그날 한 받아쓰기 종이가 있다. 고구마, 고구마, 고구마, 고구마, 나비, 나비, 나비, 나비... 꽤 어려운 단어인 '훨훨훨'이나 '뾰족뾰족'도 있고, 한 단어당 최소 4번 정도 쓰여있다. 하지만 미루는 결코 그 단어를 읽지 못한다. 그냥 베껴 쓰는 것일 뿐. 

학창 시절 시험공부를 했던 때가 떠오른다. 연습장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으며 공부하긴 했는데 막상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던 그때. 만약 시험이라는 당면 과제가 아닌 즐겁게 지식을 탐구했다면 얘기는 달랐을 거다. 미루는 아직 문자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 아이에게 받아쓰기는 그리기 밖에 안 될 텐데, 이런 받아쓰기가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미루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인상 깊었던 일을 미루가 몇 문장으로 정리하면 그걸 내가 쓰고, 내가 쓴 걸 미루가 밑에 받아 쓴다. 반복되는 글자가 나오자 '엄마! 또 '요'가 나왔어!' 한다. 이러다 보면 관심 가질 날이 오겠지.


사족 3.

여행 중엔 자의든 타의든 홈스쿨링을 해야 한다. 원래 자기 자식은 가르치면 혈압 올라 뒷목 잡고 쓰러져서 안 하는 게 상책이라던데, 앞으로 미루가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면 그건 순전히 내 탓이다. 벌써부터 어깨가 무거워진다. 이제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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