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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Mar 22. 2019

ep#58: 미루의 다중 언어

나 한때 6개 국어를 했던 여자야!

CHAPTER 05: 너와 함께

ep#58: 미루의 언어


6개 국어! 아이고, 복잡해...


# 다문화 가족의 큰 숙제


다문화 가족에겐 피할 수 없는 숙제가 있다. 바로 아이의 이중 혹은 다중언어다. 엄마 언어와 아빠 언어가 다르니 시작부터 언어가 두 개고, 또 가족 내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사는 곳의 언어, 혹은 또래 집단의 언어가 다를 경우 삼중, 사중으로 늘어나기도 한다. 그걸 어떻게 아이가 혼돈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느냐가 모든 다문화 가족 부모의 당면 과제다. 대부분의 다문화 가족이 엄마, 아빠가 자신의 모국어로 아이와 소통하는 OPOL (One Person, One Language) 방법을 사용한다. 쉽게 말해 나는 미루에게 한국어로만, 카밀은 네덜란드어로만 꾸준히 소통하는 식이다. 우리도 미루가 어렸을 때부터 이 방법을 유지했고, 그래서 우리의 저녁 식탁은 항상 여러 언어가 정신없이 오간다. 

대부분의 다중 언어 아이들은 말이 느리다. 하나도 벅찬데 2, 3개를 동시에 작동시키니 느린 건 당연하다. 어쩔 땐 5살 넘게까지 말이 트이지 않아 부모의 마음을 졸이게 할 때도 있는데, 인터넷의 많은 다중 언어 포럼에서 이런 하소연을 하는 부모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책 좀 읽을까, 미루야?


# 미루의 언어 역사 


미루는 처음부터 3개의 언어에 노출되었다. 한국어, 네덜란드어, 그리고 카밀과 내가 소통하는 영어. 미루 역시 느린 발달을 보였지만 난 우리의 특수한 환경 상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하고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마마카라바나를 할 땐 한국어, 네덜란드어, 영어, 포르투갈어, 독일어, 체코어, 이렇게 6개 국어에 노출되기까지도 했으니 말 다 했지. 

언어는 역시 또래와 놀 때 가장 빨리 배우는 것 같다. 마마카라바나를 하면서 항상 올리비아와 레오와 붙어있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이 하는 말을 따라 했고, 그러자 평소 하던 한국어도 다른 언어로 바뀌어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변천사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엔 ‘엄마’, 다음엔 네덜란드어로 ‘마마’, 얼마 안 가 포르투갈어로 ‘마이’라 하더니 나중엔 체코어인 ‘마밍꼬’에 정착했다. 물도 포르투갈어로 ‘아구아(agua)’ 하더니 체코어로 ‘보다(voda)’, 부정어도 포르투갈어로 ‘나오(não)’ 하더니 독어로 ‘나인(nein)’하다가 영어로 ‘노’라 했다. 창문 열어달라고 할 땐 영어로 ‘오픈’, 내려가겠다고 할 땐 포르투갈어로 ‘샤오 (바닥이란 뜻)’, 뭔가를 원할 땐 한국어로 ‘이거’, 예쁜 걸 보면 네덜란드어로 ‘모이’, 식사하기 전엔 독어로 ‘구튼 아프팉!’ 아플 땐 포르투갈어로 ‘도이도이’. 세상에나, 이렇게 뒤죽박죽 된 세상이라니! 도대체 28개월 미루 머릿속엔 뭐가 들어있을까? 이거 이래도 괜찮은 건가?   

     

곤욕스러웠던 건 내가 포르투갈어, 독어, 체코어를 모르다 보니 미루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었다. 시소를 타고 노는데 미루가 샤오, 샤오, 하길래 평소 하는 외계어겠거니 했는데 릴리가 옆구리를 꾹 찌르며 ‘샤오’는 바닥이란 뜻이라며 미루가 내려가고 싶은가 보다고 귀띔해줬다. 또 접시 하나를 다 비운 후 메어! 메어! 하길래 무슨 뜻인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릴리가 메어는 독어로 ‘더(more)’란 뜻이라고 얘기해줬다. 

결국 내 무식이 죄구나.
미루야, 이 무식한 엄마를 용서해다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젠가 정착을 하게 되면 그 나라 언어를 반드시 마스터하리라고. 


난 천천히 기다릴게. 널 믿어.


솔직히 미루의 언어 발달이 어떤 상황인지 당시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또래에 비해 느린 건 확실했으나, 올리비아 역시 포르투갈어, 독어, 영어의 다중언어 아이였고, 레오도 포르투갈어, 체코어의 다중언어 아이였기 때문에 달리 비교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고 믿는 난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달리 걱정은 안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미안해졌다. 별난 부모를 만난 탓에 진득하게 한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해서. 그 작은 뇌 속에 얼마나 많은 단어와 문장들이 팽팽 돌아갈까 짠해서. 릴리와 알레나는 농담처럼 미루가 커서 20개 국어를 하는 언어 천재 되는 거 아니냐 했지만, 하나라도 확실하게 잘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이럴 경우 어떤 아이는 특정 언어를 거부하거나 말하기 자체를 거부한다던데, 다행히 미루에게 그런 혼란의 모습은 없었고 주변의 언어를 자연스레 흡수하는 듯했다. 


미루에게 문자는 아직 쓰는 게 아닌 그리는 것이다.

  

# 아이의 말은 꽃이다.


한국 나이로 7살인 현재, 미루는 한국어, 네덜란드어, 영어를 말할 줄 안다. (물론 그때 썼던 포르투갈어, 체코어, 독어 단어들은 지금 모두 잊어버렸다.) 아무래도 한국에 살고 있고 어린이집에 다니다 보니 한국어를 더 잘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다.) 그래도 카밀이 워낙 수다쟁이에 아이와 대화하는 걸 좋아해서 네덜란드어도 잘 되는 편이다. 영어는 계속 들어서인지 말은 잘 안 하지만 다 알아듣는다. 영어는 어차피 배울 것이고 카밀과 내가 집에서 쓰고 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영어 과잉 교육을 따라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요즘엔 내가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쓰는데, 계속 '엄마, 한국말할 줄 아는데 왜 잉글리시 해? 한국말 해줘.'라고 부탁한다. 하하!) 만약 다른 나라로 이주할 경우 현지 언어 역시 천천히 기다리며 중심을 잡아주는 게 관건이겠다. 아이는 스펀지와 같으니까. 오히려 내가 허덕이겠지. 

 

아이의 말은 꽃이다. 아이의 말은 금이다. 하루하루 전혀 예상치 않은 말을 툭툭 내뱉을 때마다 그 말의 매력에 빠져버린다. 여과라곤 전혀 없이 상황에 대해 너무나 적확하게 팩트 폭격을 날릴 때는 그렇게 웃길 수가 없다. 점점 늘어가는 미루의 어록을 기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언어가 이렇게 아름다운 거구나, 아이를 통해 배운다. 

미루가 여러 언어를 통해 사고의 유연성을 넓히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익히길 바란다. 예전엔 다중 언어가 아이에게 혼돈을 준다는 생각에 꺼려왔지만, 오히려 세상을 더 깊게 보고 복합적인 인지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에 이런 기회를 얻은 미루가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4살 때 칠판 앞에서. 아직 글보단 그림/낙서가 더 좋다.


# 아, 그나저나,


가만 보면 유럽에 있을 때 누구 하나 미루의 언어가 느리다고 뭐라 한 적은 없던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없다. 말 빠른 거에 민감한 건 우리나라만 그런 건가?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는 뭐든 빠르지 못해 안달이다. 기저귀도 빨리 떼어야 하고, 걷는 것도 빨라야 하고, 글도 빨리 읽어야 한다. 기저귀 떼기에 경쟁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고, 느리면 마치 큰 문제가 있는 양 호들갑을 떤다. 


사실 개월 수, 혹은 나이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다는 건 어찌 생각하면 소름 끼치는 일이다. 아이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닌데 말이다. 미루의 언어 발달이 조금 느렸다고 할지언정, 지금은 여느 아이와 전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지 아빠 꼭 닮아서!) 너무 말이 많아 탈이니, 느렸던 게 다행이었다. 지금도 두 사람의 수다를 견디기 힘든데, 진작부터 이랬더라면... 어이쿠,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하하!


All photos by Yellow Duck.


p.s: 미루의 어린이집에서 매일 받아쓰기를 한다. 집에 오면 꼭 가방에 그날 한 받아쓰기 종이가 있다. 고구마, 고구마, 고구마, 고구마, 나비,나비, 나비, 나비... 어쩔 때는 꽤 어려운 단어인 '훨훨훨'이나 '뾰족뾰족'도 있고, 한 단어당 최소 4번 정도 쓰여있다. 하지만 미루는 결코 그 단어를 읽지 못한다. 말 그대로 그냥 베껴 쓰는 거지 그걸 읽어야겠단 인식이 없는 거다. 

문득 학창 시절 시험공부를 했던 때가 떠오른다. 연습장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으며 (영어 단어나 국사 연도 같은 거) 공부를 하긴 하는데 막상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던 그때. 만약 시험이라는 목표에 의해서가 아닌 즐겁게 지식을 탐구했다면 얘기는 달랐을 거다. 미루는 아직 문자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 아이에게 받아쓰기는 진짜 그리기 밖에 안 된다. 무조건 받아쓰기를 하는 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미루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인상 깊었던 일을 미루가 몇 문장으로 정리하면 그걸 내가 쓰고, 내가 쓴 걸 미루가 밑에 받아 쓴다. 반복되는 글자가 나오자 '엄마! 또 '요'가 나왔어!' 한다.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통으로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우선 기다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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