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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Dec 21. 2018

질문 열여섯: 아이 데리고 다니기 안 힘들어요?

도시여, 애 엄마에게 봄바람을 허락하라!

제아무리 매력적인 도시에 있으면 뭐하나?
결국 난 그저 애 엄마인 것을. 나 외국에 있는 거 맞아?
엄마의 숙명은 결국 이렇단 말인가!

억울해서라도 매일매일 산책을. 나 베를린에 있는 거 맞아?


# 그때 그 순간, 그 베를린


생후 6개월 된 미루를 데리고 한국을 떠났을 때 우리가 도착한  도시는 베를린이었다. 때는 여름의 끝자락이었고 상록은 푸르렀다. 하디 힙하다는 베를린은 아무리 힙하다 해도 그렇지 그렇게 힙할 수 없었으니, 내 비록 40대 중년 아줌마라지만 마음속엔 항상 봄처녀가 교태를 부리며 새  옷 입고 재 오기 바빴는데… 아! 현실은 이유식 만들고 저지레 처리하기 바쁜 벽한 아줌마였다. 베를린에서 베를린인 듯 베를린 아닌 베를린 같은 생활이라니!

 

한 번은 낮잠 재우려고 아기 띠를 매고 방을 돌다가 슬쩍 창밖을 보는데,  티셔츠에 살짝 타이트한 청바지, 군청색 카디건에 검은색 비니, 적당히 마른 체형에 약간의 수염이 난 잘생긴 얼굴, 이른바 전형적인 베를린 힙스터를 표방하는 청년이 지나가는 게 아닌가! 순간 심쿵, 심장이 다! 약속에 늦었나, 무슨 급한 일이 있어 그리 종종걸음으로 가시는지, 그가 도는 코너가 아쉬워 미루를 맨 채 창문 너머로 고개를 욱 내미는데 문득 가을을 예고하는 마지막 여름 바람이 내 을 스친다. 하늘을 보니 물감 원액을 그대로 부 파란색과 아낌없이 쏟아지는 노란색 살에 눈이 부시고 그 밑으로 역시나 세련된 다리 젊은이들이 떼거로 지나간다. 순간 헷갈린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아, 그래, 여긴 베를린이지. 지금은 이천 하고도 십몇 년이고, 난, 난, 난… 지금 이 아이를 재워야 하는 아줌마다. 미루야, 너 왜 빨리 안 자니?


넌 그렇게 웃지만, 난, 난...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 그때 그 순간, 그 리스본


장면은 건너뛰어 미루가 만 두 인 5월의 리스본다. 질이 달라도 너무 다른 리스본의 햇살은 이래도 안 나올래! 소리치며 나를 유혹한다. 나가서 시원한 냉커피와 함께 공원에 누워 한적하게 책을 고 싶다. 이 좋은 날, 집에만 있는 게 말이 ? 그래, 나가자! 

자, 그러려면… 우선 미루 옷 좀 입히고, 기저귀 좀 챙기고, 친구에게 유모차 빌릴 수 있는지 보고, 안 될 경우 카밀이 아기 띠 매고 나갈 수 있는지 보고. 유모차 써도 된다고? 좋았어. 그럼 혼자 나갈 수 있어. 뭘 챙기지? 여분 옷, 물통, 물티슈, 간식… 오케이 웬만큼 챙겼어. 그런데 어디로 갈까? 공원은 매일 가서 지겹고, 베이샤까지 가기엔 너무 고, 그럼 오랜만에 굴벤키안 뮤지엄이나 갈까? 그런데 뭐라고, 미루야? 배고프다고? 방금 먹었잖아. 하아… 알았어. 과일이라도 먹어. 우유 좀 마시고. 왜 또 흘리고 그래… 갈아입자.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네가 흘렸잖아. 오올~치. 됐지? 그럼 이제 나갈까? 뭐? 응가하고 싶다고? 알았어. 기다릴게. 다 했어? 자, 그럼 이제 정말 나간다! 말 없기다! 오케이? 가자!

나가기로 결심한 후 현관문을 열기까지, 과연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당신의 상상에 긴다. 애 한 번 데리고 나가는 건 서울이건 베를린이건 리스본이건 제다이 수련과 같다.

 

자,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숨 한 번 크게 들이켜고 이 청량한 공기와 빛을 모두 빨아들이겠다는 각오로 유모차를 힘껏 밀어 본다. 그런데 바로 ! 유모차 바퀴가 걸린다. 아뿔싸, 리스본 길은 웬만하면 다 돌길이고 언덕길이지… 리스본은 영유아 아이들과 다니기에 결코 쉬운 도시가 아니다. 아이와 외출하고 돌아오면 그야말로 난 초가 됐다. 무거워지는 미루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내 체력이 너무 저질이었던 것이다. 카밀이 따로 동행하지 않는 한 외출은 내 허리를 박살 내는 초특급 지름길이었고,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호기심에 돌아다니는 미루를 아다니는 건… 상상도 하기 싫다. 그리하여 또 반복하는가? 리스본에서 리스본인 듯 리스본 아닌 리스본 같은 생활. 지금은 이천 하고도 십몇 년이고, 난, 난, 난… 지금 빛의 속도로 뛰어가는 아이를 못 잡고 헉대는 아줌마다. 미루야, 너 왜 그렇게 빠르니?


그런 나를 위로해주었던 리스본의 에드아르두 공원


# 도시여, 나에게 봄바람을 허락하라!


그래, 베를린 힙스터니, 리스본 낭만이니, 다 무슨 소용이야. 결국 난 애 딸린 아줌마인 것을. 엄마가 되면 다 이런 거야? 제아무리 매력적인 도시에 있으면 뭐 하나. 시간은 속절없이 나만 두고 가고 생활은 흐르지 않는 처럼 고여가는 것을. 미루가 주는 엄청난 행복에도 불구하고 남의 사정 모르고 눈치 없 하기만 한 저 하늘이 미웠다. 엄마의 숙명이여, 나에게 자유를 허락하소서!

육아로 지친  링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공원이다. 뛰노는 미루를 벤치에 앉아 지켜볼 수 있는 공원. 베를린에서는 템펠호프(Tempelhofer) 공원이었고 리스본에서는 에드아르두(Educardo) 공원이었다.  다 모두 집 근처여서 가능했다. 풀밭을 기는 미루 사진에 살인 진드기 모르냐고 기겁하시는 친정엄마의 잔을 들을지언정 난 매일 공원으로 출근 도장을 찍고 최대한 일상 내를 냈다. 어딜 못 간다고 해서 그 도시를 못 누리는 건 아닐 테니까. 난 유럽 도시에서 공원이 가장 많은 베를린의 녹색 향연과 아줄레주(Azulejo) 타일에 반사되어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때깔로 반짝이는 리스본의 빛을 누리고 있었다. 공원의 일상은 내게 그걸 지 말라고 속삭여주었다.

 

여전히 매력적인 도시는 숨을 쉬었고 아줌마의 마음을 거리게 하는 젊은 총각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쉽게도 아줌마는 육아로 찌들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창문을 활짝 열고 목청 높여 총각을 부르고 싶었다.


“어이, 총각! 시간 되면 잠깐 들어와 차나 한잔하고 가지?
걱정 말아요, 내 어찌 안 할 테니…”


도시여, 애 엄마에게 봄바람을 허락하라!


전망대에서 바라본 리스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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