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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Jan 13. 2019

에필로그 3: Now What?

여행처럼 스펙터클 하지 않아도, 별일 없이 잘 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질문할 거다.
Now what?
오케이, 지금까지 당신 얘기 잘 들었는데,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인생은 오지 않는 고도씨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 그래서 어쩔 건데?


그리하여, 사람들은 질문할 거다.

- Now what? 오케이, 지금까지 당신 얘기 잘 들었는데,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글쎄다. 뭐라고 답을 할까? 뭐라고 답해야 그럴싸하게 폼이 날까? 그런데 어쩌나… 그 어떤 답도 폼이 날 것 같지가 않다. 답을 한다 해도 그대로 실행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나중에 ‘아님 말고’ 해버리면 무슨 소용인가? 만약,


그리하여 그들은 유럽에서 그토록 원하던 지상 낙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The End.


같은 할리우드 해피 앤딩으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득달같이 달려들어 ‘외국에서 성공하는 법’이라며 팁을 찾으려고 할까? 서점에서 자기 계발서 분야에서 ‘이달의 책'으로 선정돼 베스트셀러가 될까? 그럼 나도 뭔가 내세울 게 있고 체면 좀 차리겠지? 인터뷰에도 요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며 자신 있게 일목요연 말할 수 있겠지? 그런데 어쩌나. 그런 해피 앤딩이 아니네. 요즘 기준에서 ‘성공’이라 할만한 그럴싸한 게 없네. 왕년 들먹이며 이런저런 일을 했다고 한들, 그래서 뭐? 지금은 그저 서울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일 뿐이잖아. 이래서야 폼 잡을만한 게 있겠어?

그런데 그거 아닌가? 장기하가 그랬듯, 당신이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려주겠다. 그건 바로, 우린 참 별일 없이 잘살고 있다는 거다!



# 우린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다.


그동안 난 이렇게 살았다. 아침 8시에 일어나 미루를 깨우고 입히고 먹인 후 9시 반까지 어린이집에 등원시킨다. 집으로 돌아와 티 한 잔과 함께 카밀과 빵과 과일로 아침을 먹는다. (얼마 전에 커피를 끊었다) 미루가 하원 후 가는 태권도 학원이 끝나는 오후 5시까지 시간이 있다. 난 청소, 빨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이나 은행, 관공서, 병원 같은 허드렛일 외에 내가 주관하는 여행 드로잉 수업 준비를 하고,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내가 살았던 도시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 정리를 하고, 책을 읽고, 인터넷 뉴스로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기부를 하고, SNS를 보고, 유튜브를 보고, 친구와 카톡을 하고, 방탄소년단 춤 연습을 하고, 슬쩍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가 싸게 나온 유럽 땅이나 아티스트 레지던시로 만들만한 건물이 있나 보고, 이야 여기 멋있네! 여기 살면 끝내주겠네! 입맛을 다시다가 너무 비싸서 김이 새고, 어떻게 돈을 벌어 여기를 살까 고민을 한다. 수다쟁이 남편님 이야기를 응응~ 하며 들어주다가 만들고 싶은 그림책 아이디어를 위해 리서치를 하고 괜찮은 공연 영상을 보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그러다 엄마는 뭐 하시나 궁금해 전화를 드린다. 아버지 안부를 묻고 엄마와 수다를 떤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다) 사느라 바빠 보기 힘든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밥을 먹거나 노닥거리기도 하고 게으름도 피운다. 시간이 많을 것 같지만 중간에 점심 먹고 어쩌고 하다 보면 이 중 하나도 제대로 못 한 채 허둥지둥 미루를 픽업하러 가야 한다. 오늘은 어땠어? 미루의 하루를 확인하며 놀이터에서 놀거나 집에 와서 그림을 그리거나 동영상을 보며 논다.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기까지 한바탕 전쟁을 하고,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갔구나!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한강에서 4~8킬로 정도 달린 후 샤워를 하고 낮에 하던 일을 계속하거나 카밀과 얘기를 하거나 같이 미드 한 편을 본 후 밤 1~2시에 잔다. 크게 뭔가 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희한하게 일주일이 너무 빨리 간다. 솔직히 내 삶의 질이나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할 시간이나 여유는 그리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안다.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원인 모를 치통으로 오래 고생하던 카밀도 드디어 해방되어 기운을 차렸다. 매일 짧은 시 한 편을 SNS에 올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한다. 길게 끌었던 소설 한 편을 완성했고 출판사 여러 곳에 밑져야 본전이라며 투고를 한다. 다음 소설 아이디어를 위해 리서치를 하고 미루와 합작으로 만든 동화책도 완성했다. 언어 교환을 하고 책을 읽고 인터넷을 통해 사회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바이올린 즉흥 연주를 한다. 미루를 데리고 북한산으로 등산가고 싼 거 사는 재미로 황학동 벼룩시장에 놀러 간다. 가족 부양의 책임감 때문에 번역을 하지만 빨리 글쓰기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오히려 더 악착같이 번역을 한다. 카밀 역시 잘살고 있다.


그 누구보다 잘 사는 건 미루다. 종일 어린이집에서 신나게 놀고도 하원 후에도 노느라 바쁘다. 아빠의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고 좋아하는 아델(Adele)의 'Someone Like You' 노래를 부른다. 한국말도 일취월장했고 어딜 가나 사람들의 사랑을, 특히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인생이 마냥 즐겁고 무엇보다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큰다.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8살. 교육 걱정을 안 할 수가 없고 부모 욕심이 발동 안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난 지금 이 녀석 크는 거 보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그걸 즐기기 바쁘다.


그동안 이렇게 잘 살았다. 뭐 별거 없다. 전처럼 자동차가 불타는 드라마도 없고 아궁이에 불 때러 나뭇가지 꺾는 노동도 없고 캐러밴으로 삼천오백 킬로미터를 달리는 스펙터클도 없다. 그 모든 난리를 뒤로하고 처음에도 썼듯 대단한 야망도 거창한 대의명분도 자조적 낭만이나 쓸데없는 합리화도 없이, 한 자리에서 꾸준히 소소하게 쌓이는 일상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의 힘과 가치, 그 경건함을 깨달으며 살았다.


영원히 이렇게 안개 속이진 않겠지.


# 우린 집으로 가고 있다.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질문한다. 됐고, 이제 어쩔 건데? 거기에 난 조심스레 답한다. 어쩌겠다는 계획보다는 ‘어떻게’ 사느냐를 생각하고 싶다고. ‘어디서’ 사느냐, ‘뭐하고’ 사느냐, ‘뭘 먹고’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현재에 충실하며 돈을 차곡차곡 모으고, 지구를 생각하며 건강을 잃지 않고, 이웃과 연대하며 사랑하는 내 가족과 소소하게 꽁냥꽁냥, 올곧은 중심으로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내 창조의 기술을 발휘하며 살고 싶다고. 내일이라도 당장 떠날 준비를 하지만 언젠가는 멋진 정착을 할 거라 꿈꾸며 살고 싶다고. 사뭇 비장한 이 말이 누구에겐 오글거릴 수도, 뜬구름 잡는 소리일 수도, 철없는 몽상일 수도 있겠다. 나의 지향점을 당신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향점이 다른 당신과 나도 결국 어떤 형태로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투쟁하며 버텨낸다는 점에서 동지애를 느낄 수 있진 않을까?


다시 비행기를 탄다. 한국에서 보낸 잔잔하고 소소했던 3년의 힘을 원천으로 삼아 지금 당장의 현실이 허락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원하는 삶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떠난다. 무궁무진한 세상과 그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을 미루에게 보여주기 위해 떠난다. 아직 다다르지 못한 우리 집을 찾기 위해 떠난다. 종착지가 어디일지는 아직 모른다. 네 나이를 생각하라는 친구들에게 너나 잘하라고 농담 섞인 핀잔을 주며 떠난다. 한때는 노마드를 부정했지만, 이제는 껴안으려고 한다. 한 곳에서 살건 길 위에서 살건 조금이나마 진일보한 삶을 살려는 방향성만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든 그건 노마드적 삶일 것이다.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하고 지겨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 이 정도라면 얼추 폼 잡을만한 인생인 것 같다.


어느새 게이트로 갈 시간이다. 여권과 탑승권을 확인한다. 이제 우린 집으로 간다.

당신이 내게 던졌던 모든 질문에 답이 되었기를. 더불어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할 화두를 주었다면,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지?'하고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면, 비행기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가벼워질 것 같다. ‘노마드 베이비 미루’의 엔딩도 오픈 엔딩이었다. 카밀과 미루와 함께 지금도 이렇게 오픈으로 끝낼 수 있어서 기쁘다.


이제 진짜 갈게요. 포옹 한 번 해요. 건강하세요.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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