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Do는 직장인만 쓰는 게 아니었다
백수 생활도 곧 청산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쓸 수 있는 돈도 슬슬 바닥이 드러나고 있고, 더 쉬면 진짜 이직을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생기기 시작했다. 얼마 안 남은(것으로 추측되는) 백수 기간을 어떻게 더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직장인이었을 때는 백수를 꿈꾸며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새로운 것도 배워보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회사를 그만두니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리고 하루는 왜 이렇게 짧은지. 아침에 눈뜨면 강아지와 산책하고, 씻고, 점심을 차려 먹고 나면 1시가 훌쩍 넘는다. '이제 뭐 할까' 고민하다 보면 2, 3시는 금방이다. 외출하기엔 애매한 시간. 그래서 노트북과 책을 한 권 가방에 넣고 근처 스타벅스나 도서관을 간다. 책을 뒤적이고, 몇 줄 끄적이다 보면 저녁 시간이 된다. 저녁 식사 후 강아지와 산책하고, 넷플릭스와 릴스를 보다가 잔다. 백수가 되면 일상이 특별해질 거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반복적이다. 그리고 무의미하다.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반복적인 행위들.
다시 직장인이 되면 이렇게 여유로운 시기를 갖긴 어려울 것이다. 소중한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노잼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슬기로운 백수 생활'을 위해 To Do 리스트를 쓰기로 했다.
이사 온 지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낯선 동네 도장 깨기를 해볼까? 여행을 갈까?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 볼까? 아, 나 원래 드럼 배우고 싶었지! 드럼을 배울까?
To Do 리스트를 쓰려고 자리에 앉았더니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면 다음으로 해야 할 것.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 바로 수많은 생각 중에 실천 가능할 목록을 찾아내는 것이다. 실천 가능한 목록과 불가능한 목록을 분류한 뒤, 살아남은 최종 To Do들을 메모장에 써넣었다. 그렇게 남은 6개의 목록. 그중 하나는 이미 실행했다.
2년 전, 한창 갓생에 빠져있던 나는 오전 5시 30분에 기상했다. 아침 운동을 다녀온 뒤, 출근 준비를 했다. 일찍 일어나 운동으로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는 내가 좋았다. 슬프게도 올해 초부터는 몸과 마음이 지치는 바람에 체력이 많이 떨어졌고, 7시를 넘겨 일어나는 게 다반사였다. 다시 5시 30분 기상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해 봤지만 이미 지친 나는 실패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진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때처럼 5시 30분 기상은 어렵지만, 6시 10분 전후 기상으로 앞당겼다. 5시 30분 고지가 눈앞이다.
한때는 글쓰기가 직업이었다. 매일 수많은 기사를 읽고 썼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긴 글이 안 읽히기 시작했다. 아마 숏폼 등 수많은 시각적 콘텐츠에 자극을 받은 뇌가 텍스트를 못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싶다. 10년 전만 해도 책 한 권을 이틀, 사흘이면 완독 했는데, 이제는 한 페이지 넘기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래서 시간이 여유로운 이 시기를 이용해 뇌를 회복시키기로 결심했다. 일주일에 책 한 권부터 천천히 시작해 볼 테다. (읽다가 재미있는 책이 있다면 소개할 예정이다. 매거진 <독서기록장>을 주목해 주시길)
직장인이었을 땐 꿈도 못 꿨을 일이다. 지금의 나는 눈치 보지 않고 평일 9 to 6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백수라는 멋진 직업을 가졌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가장 설레는 일, 바로 ‘평일 낮 시간에 가고 싶은 곳 가기’다. 그래서 전시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전시, 영화 등 문화생활을 좋아했다. 직장인이 된 이후에는 평일에 시간내기 어려워 주말에 문화생활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평일에 시간낼 수 없는 건 남들도 다 똑같은 이야기. 북적이는 주말의 갤러리, 영화관은 내 취향이 아니었고, 그래서 문화생활을 그만뒀다. 얼마 전,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다. 얼마 전 개봉한 ’데드풀과 울버린‘을 돌비애트모스로 봤다. 평일 아침이었는데, 예매할 당시 영화관이 텅텅 비어있는 걸 보고 ’설마‘했다. 그리고 설마는 역시였다. 그 큰 상영관에 나뿐이었고(상영 시작한 뒤에 2명이 들어오긴 했지만) 전체를 대관한 것 같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상영관에 나만 있는 짜릿함, 왠지 영화 보다가 소리를 질러도 될 것 같은 자유로움. 한 번 맛보니 또 해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평일 낮에 혼자 영화 보기, 미션 클리어! 곧 전시 보러 가기도 해내야지.
마지막 To Do는 여행이다. 조금 뜬금없지만 나는 하늘에 관심이 많다. 낮에는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을 보기 위해 길을 걷다 멈춰 서서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본다. 또 가끔 구름 없는 날이면 천문대에 놀러 간다. 쏟아질 것 같은 별들과 달, 운 좋으면 토성 등 다른 행성들도 볼 수 있다. 근래에는 비가 자주 와서 별을 보기 어려웠는데, 다시 직장인이 되기 전 꼭 보러 가려한다. 이번에는 별 관측 명소 중 한 곳인 ‘연천 당포성’에 갈 예정. 처음 가보는 곳이라 매우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꼭 가고 싶은 곳, 강릉. 그곳에는 다양한 추억들이 남아있다. 나의 강아지 옥돌과 처음 여행 간 곳, 첫 차를 뽑고 친구들과 함께 떠난 첫 여행지,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2020년 2월 나에게 위안을 준 따뜻한 곳. 나는 강릉을 좋아한다. 특히 강릉의 아름다운 해변들이. 강릉 바다들이 매번 나에게 큰 행복을 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추억을 주길.
나의 소박한 To Do들이 지금 이 시기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