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X 수영: 용기 세포를 깨우는 알프스 빙하수의 짜릿함
취리히 하면 생각나는 별명이 무엇인가? 호반의 도시? 첨탑의 도시? 금융의 도시? 종교개혁의 도시? FIFA의 도시? 아직 우리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별명이 하나 있다. 취리히는 ‘수영의 도시'이다.
2019년 여름에는 이상기후로 사하라 열풍이 전 유럽을 강타 중이었다. 뜨거운 사막의 열기로 숨이 턱턱 막히는 날이었다. 땀을 쏟으며 리마강 근처를 지나고 있었는데, 웬 젊은이들이 강 위 다리에서 펄쩍펄쩍 뛰어내리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뭘 본거지?! 다행히 극단적 선택이라기에는 하는 사람들 얼굴이 해맑고 웃음이 가득하다. 더운 날씨에 열을 식히러 리마 강 바디(Badis)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었다. 첨벙첨벙, 상류에 뛰어들어 하류까지 떠내려가는 강물에 몸을 맡긴다. 호우! 내지르는 탄성들이 알프스 빙하서 내려온 강물만큼이나 시원하다.
파리가 아무리 예쁘고 좋아도 센강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취리히에는 곳곳에 있는 바디(Badis)는 천연 공공 수영장 같은 곳이다. 로마 시대부터 이곳에서 사람들이 야외 수영을 즐겼다고 한다. 19세기에 이르러 제법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다. 시 의회가 주민들 개별 가정에 상수도를 설치하는 것보다 비용이 저렴하다고 판단하여 공중목욕탕 개념으로 설치했다고 한다. 위생적 필요 시작되었으나 어느덧 인기가 많아져 유행이 되었다. 1930년대에는 노동자층, 부유층 등 여러 계층을 불러 모으는 다양한 바디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여성전용, 남성 전용 바디부터 시작하여 일부는 저녁에 바나 라이브 뮤직 펍으로 변신한다. 파리가 아무리 예쁘고 좋아도 센강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한강은 또 어떠한가. 템즈강은? 헛슨강은? ‘수영의 도시' 취리가 가진 매력이 특별한 이유이다.
이 도시에는 왠지 용기의 기운이 충만한 듯하다
다음날 수영복을 챙겨 바디로 향했다. '나도 저 젊은이들의 청량감 넘치는 자유를 맛보고 싶다!' 차마 높은 다리 위에는 못 서고 근처에 아담한 점프대에 선다. 그마저도 의욕만 앞섰지 겁이 너무 난다. 아직 남은 여행 기간도 많고, 관절도 수호해야 하고, 다음날 일도 있고, 이 위험천만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할 수만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뛸까 말까, 뛸까, 말까, 뛸까?! 말까.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는데, 아뿔싸 이미 뒤로 줄이 길어지고 있다. 운명의 순간이 다가온다.
이렇게 나에게는 공포스럽게 그지없었던(?) 투신행위를 매 여름마다 훌쩍훌쩍 감행하는 젊은이들 덕분인가. 이 도시에는 왠지 용기의 기운이 충만한 듯하다. 19세기 중반 취리히는 ‘재생 운동(Regeneration)’의 중심지였다.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으로 스위스 연방 내에서도 봉건적 제약을 벗어나 시민적 자유를 확립하려는 운동이 일었다. 수많은 투쟁과 희생이 뒤따랐다. 공고한 과거와 단절을 위해 몸을 던진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덕분에 도시는 구질서의 모순 속에 다가오는 느린 죽음을 피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잃을 게 많고, 아프고, 힘들고, 죽을 것 같아도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
나는 새롭게 태어날 용기가 있나. 그러기 위해 지금의 나를 던져버릴 용기가 있나. 잃을 게 많고, 아프고, 힘들고, 죽을 것 같아도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 이제 겨우 얻은 안도의 공간을 과감히 버리고 다시 불안과 회의의 공간에 발을 디딜 용기. 이 거창한 용기들을 떠올리기 전에 일단 이 2m의 점프대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먼저 필요하다.
심장을 부여잡고 뛰어내린다. 눈 꾹 감고. 하나, 둘, 셋! 풍덩! 사하라 열풍으로 무덥던 여름. 알프스 빙하의 기운을 머금은 냉수 속에서 온몸의 세포가 찌릿하게 깨어난다. 리마 강 수면 위로 다시 솟아오른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리마 강에는 왠지 차디찬 알프스 빙하의 기운만큼이나 정신을 번뜩 들게 하는 용기의 기운이 서려있을 것만 같다
용기가 필요한 이들에게 권해본다. 무더운 여름날에 알프스빙하 냉기를 머금은 리마 강에 시원하게 뛰어들어 보라. 이 도시가 지닌 용기의 기운에 몸을 던져보라. 리마 강에는 왠지 차디찬 알프스 빙하의 기운만큼이나 정신을 번뜩 들게 하는 용기의 기운이 서려있을 것만 같다. 온몸으로 느껴보라. 짜릿하게 잠들어 있는 용기의 세포가 깨어나는 순간들을.
자 하나, 둘, 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