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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삭 Dec 07. 2023

스페인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

여행 X 미식: 수용과 승화의 미학



스페인 사람들은 점심에 진심이다. 점심은 하루  가장 중요한 식사다.  중요한 식사를 만족스럽게 하기 위한 현지인들의 팁이 하나 있다. 입간판이나 메뉴판에  '메뉴  디아'(Menu del dia) 적어놓은 주인장의 글씨를  살펴보는 것이다. 휘휘 날림 글씨로 급하게 써진 메뉴를 가진 식당일수록 제대로  '메뉴  디아' 대접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미리 준비된 메뉴 없이 그날 아침 신선한 재료를 보고 바삐 새로 메뉴를 짜고 써내려 갔기 때문이다. 메뉴판의 글씨가 거칠수록  셰프가 얼마나 그날의 재료, 환경과 치열한   승부를 벌였는지를 드러낸다.


그날 하루만 맛볼 수 있는 서사가 있다.


'메뉴 델 디아'는 '오늘의 메뉴'라는 뜻이다. 주중 점심에 10-20유로 사이의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는 일종의 가벼운 코스 메뉴다. '메뉴 델 디아'의 메뉴는 계절의 리듬과 신선한 재료의 가용성에 따라 매일 달라진다. 셰프는 그날 주어진 재료 속에 담긴 계절, 땅, 바다의 변화를 요리에 조화롭게 담기 위해 고민한다. 전채 요리(Primero)부터 메인(Segundo), 후식(Postre)에 이르기까지 그날 하루만 맛볼 수 있는 서사가 있다. 그 풍미, 질감, 향 속에 담긴 이야기는 다시 재현될 수 없다. 한 입, 한 입 음미하며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그 재료를 어떻게 해석하고 녹여냈는지 셰프의 의도와 정성, 숨은 메시지를 발굴하려 집중하게 된다.



 '메뉴 델 디아'가 성숙한 수용과 승화를 위한 정신적 양분을 주는 듯하다.


'메뉴 델 디아'를 만들 때 바꿀 수 없는 재료의 제약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어울리는 조합을 찾고자 여러 조리법을 시도하고, 때로는 도전적인 선택을 감행하면서 맛을 더하는 행위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다양한 제약에서 더 특별하고 가치 있는 맛의 작품이 탄생한다는 데 수용과 승화의 미를 느낀다. 입 안의 '메뉴 델 디아'를 음미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제약들을 부정하거나 혐오하며 완벽한 행복의 조건과 환경을 찾아 헤매기보다, 나만의 삶 속에 주어진 이 특별한 재료들을 맛깔나게 요리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머금어본다.  '메뉴 델 디아'가 성숙한 수용과 승화를 위한 정신적 양분을 주는 듯하다.



오늘 하루 나만의 '메뉴 델 디아'를 어떻게 구성해 볼지 생각해 본다.


평범한 평일 점심에서 식사는 음미의 대상에서 절약의 대상이 되기 쉽다. 주린 배를 불리는 데 들이는 시간을 줄여 은행업무, 병원진료, 관공서 방문 등 자질구레하기 그지없는 일들을 챙길 틈을 만든다. 이런 바쁨 속에 잊히는 것은 제대로 된 식사뿐 아니라 삶을 더욱 풍성하고 재미(味) 있게 만들 수 있는 크고 작은 우연한 순간들 일지 모르겠다. 내가 셰프라면 오늘 하루 나만의 '메뉴 델 디아'를 어떻게 구성해 볼지 생각해 본다. 전채 요리로는 눈떠보니 지구 반대편에서 와있던 친구의 반가운 메시지, 메인에는 작심삼일을 넘긴 새로운 운동 습관, 후식으로는 친구와 깔깔 수다를 떠는 와이프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어떨까. 제법 근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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