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X 탐험: 두드리면 열린다
'털북숭이 소(Haarige Kuh Brauerei)' 양조장은 스위스 인터라켄 그린델발트역 인근에 위치해 있다. 이 브루어리는 앤디(Andy)와 글린(Glynn)의 주방에서 시작되었다. 1990년대 초까지 스위스의 맥주 시장은 카르텔에게 점령되어 맥주 가격부터 종류, 맛까지 생산할 지에 대해서까지 담합이 이뤄졌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이 두 사람에게 과점 시장의 폭정에 휘둘리던 스위스 맥주의 천편일률적인 맛은 갈증을 해소해 주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결국 직접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만든 맥주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자 반응이 꽤 좋았다. 스키 강사로 스포츠전문점 판매원으로 일하며 자금을 모아 작은 양조장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털북숭이 소' 양조장이 시작되었다.
이들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이들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피르스트(First)로 향하기 위해 그린델발트 역에 도착했다. 열차 도착 시간까지 여유가 많았다. 한참 맥주에 빠져있던 시기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에 소규모 양조장들이 있나 인터넷을 뒤졌다. 마침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작은 양조장 하나가 있었다. 투박한 양조장 로고를 보니 왠지 가기가 망설여졌으나 도전을 감행하기로 했다.
손을 넣으면 왠지 에메랄드 색이 손에 묻어 나올 듯했다.
양조장을 향해 아레(Aare) 강을 따라 걸었다. 알프스 정상에서부터 녹아 흘러내려온 빙하수가 에메랄드빛을 뿜어내며 흘렀다. 손을 넣으면 왠지 에메랄드 색이 손에 묻어 나올 듯했다. 드문 드문 핀 야생화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보며 지금 이 광경은 현실이 아니라 저 나비가 꾸는 황홀한 꿈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걷는 동안 부풀어 가는 기대를 안고 양조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뿔싸. 문이 닫혀있다. 아무도 못 가본 숨은 보석을 발견할 생각에 잔뜩 설렜는데 실망이 크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돌리려는데, 가만 보니 커 다른 문 옆에 작은 벨이 보인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고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본다. 역시 답이 없다. 맘대로 안 되는 게 여행의 묘미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돌아선다. 그 순간, 문이 열린다!
알프스의 맑은 물에 주인장의 덕력이 더해지니 맥주 맛이 일품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방문객에 미처 준비가 안된 듯 부스스한 차림의 주인장이 문을 열어 준다. 오늘은 원래 문을 여는 날이 아니라 준비된 게 많지는 않지만, 한번 마음껏 둘러보라고 한다. 맥아, 홉을 담은 포대들이 커다란 맥주 탱크 옆에 쌓여있다. 분위기 좋은 펍보다는 정말 소규모 공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쩌다 보니 우리만을 위한 양조장 프라이빗 VIP투어를 하게 되었다. 앤디는 직접 만든 여러 실험적인 맥주들을 소개해주었다. Hazy Pale Ale, Sout, IPA, NEIPA 등 다양한 맥주를 꾸준히 빗고, 제철 과일을 넣은 시즌 한정 Sour 맥주도 만든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그동안 억지로 들이켜야 했던 라거에 대한 미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지, 라거는 없었다. 제일 좋아하는 NEIPA를 골라 맛보았다. 알프스의 맑은 물에 주인장의 덕력이 더해지니 맥주 맛이 일품이었다.
세상에는 숨겨진 맛과 이야기들이 많다. 두드리기만 하면 열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숨겨진 맛과 이야기들이 많다. 두드리기만 하면 열릴지도 모른다. 약간의 모험과 발품이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자주 떠날 수 없는 여행이기에 1분 1초가 귀하게 느껴지고, 실패할 모험에 시간을 할애하기가 망설여질 때가 많다. 그래서 차라리 맘 편히 세간에 검증된 선택지와 정형화된 여행일정에 순종할 유혹을 느낀다. 그 유혹이 과거 스위스 맥주 카르텔처럼 제한된 선택지로 폭정을 부리고 '어딜 감히' 하며 겁을 잔뜩 준다. 이를 이겨내려면 약간의 실험정신이 필요하다. 처참하게 실패할 때도 있겠지만, 생각도 못한 다채롭고 맛깔스러운 세상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털북숭이 소 양조장의 맥주처럼 개성 넘치는 향이 가득한 여행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기대 때문에 그토록 질리게 여행을 하고도 또다시 여행을 떠날 마음을 먹는다. 이번에는 또 어떤 문을 두드려볼까 생각하며 다시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