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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삭 Nov 16. 2023

스페인 세비야 타파스 바

여행 X  배려: 짧은 만남 속에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배려의 미학


세비야는 시간을 망각한  한참을 걷게 만드는 매혹적인 도시다. 거리 곳곳 주렁주렁 샛노랗게 열매가 열린 오렌지나무들 사이로 플라멩코 선율을 연주하는 기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로마네스크, 바로크, 고딕, 이슬람 양식이 혼재된 건축물 위에 여러 시대가 섞여 흐른다. 걷다 보니 허기와 갈증이 찾아오고 자연스레  튀겨진 오징어와 감자의 향이 솔솔 퍼져 나오는 타파스  앞에 멈춰 서게 된다. 이른 오후인데  안은 벌써 사람들의 반갑고도 격한 담소와 맥주잔 부딪히는 소리로 시끌벅쩍하다.


나만큼 목이 타서 바로 몰려온 손님들을 헤치고 들어가 간신히 바텐더와 눈을 마주친다. 차례를 놓칠세라 바텐더에게 “맥주 두 잔 작은 사이즈로 주세요!” 하고 황급히 주문한다. 바텐더는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작은 잔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손가락 세 마디만 한 작은 잔을 꺼내 보여준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오, 아니 미안, 큰 거로 두 잔 주세요”라고 답한다. 순간 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빵 터져 웃는다. 아니, 이 사람들 내 대화에 이렇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나? 순간 이 공간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머쓱하지만 이 불특정다수를 즐겁게 해 주었다는 데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같이 웃는다. 바텐더도 같이 활짝 웃으며 맥주 두 잔을 큰 잔에 내어오며 살짝 윙크를 건넨다. 그러면서 ‘한 잔은 서비스(on the house)야!’라고 한다. 내 입이 귀에 걸린다.


그 짧은 순간에 많은 배려가 숨어있었다.


찰나였지만 이 바텐더의 고객응대 기술에 감탄을 하게 된다. 그 짧은 순간에 많은 배려가 숨어있었다. 주문이 밀려 바쁜 와중에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이 타지인은 필시 작은 맥주로 갈증을 식히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재차 확인을 한다. 다소 유머 섞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서툰 외국으로 내 주문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이들에게 같이 약간의 여흥을 제공한다. 혹시나 내가 민망하게 느꼈을까 봐 맥주 한잔은 서비스로 건넨다. 결과적으로 바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졌다 나를 포함하여. 시원한 맥주만큼이나 바의 분위기도 경쾌하게 느껴졌다. 이 능수능란한 바텐더와 웃음 많은 현지인들 덕분에 그 순간 바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친구가 된 기분이다.



 세비야에서 잊고 지낸 마이크로 프렌드십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맛보았다.

스쳐가는 듯한 작은 만남에서 잠깐동안 유지되는 친교를 마이크로 프렌드십(micro-friendship)이라고 한다. 마이크로 프렌드십은 팍팍해져 가는 일상과 인심에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거리두기 시기를 거치며 한층 더 희귀해졌다. 나도 피상적이고 일회적인 이런 친교가 그저 피곤하게만 느껴질 때도 있고, 일부러 애써 만든 친근한 제스처가 거절 또는 거부될까 봐 두려워  외면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면 낯선 이들이 점점 더 낯설어지고, 나는 꽤나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 되어가는 듯했다. 세비야에서 잊고 지낸 마이크로 프렌드십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맛보았다. 꽤 반가웠다.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이런 짧은 만남이 마음에 큰 발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이런 짧은 만남이 마음에 큰 발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화려하고 웅장한 스페인광장, 왕실의 높은 격조가 넘쳐나는 알카사르, 콜럼버스가 잠들어 있는 세비야 대성당, 무릎이 부서져라 격렬한 춤사위를 보여줬던 플라멩코 공연,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타파스 바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건네던 바텐더의 장난기 머금은 미소가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나도 누군가의 하루에 기분 좋은 발자국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좀처럼 낯선 이들과 대화하는 법이 없지만 요즘에는 종종 시도를 해본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에게 옷이 멋지다며 코멘트를 하고, 거리에서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견주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간호사에게 오늘 금요일이라 너무 좋겠다며 (비록 내가 당신의 일거리이지만)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나도 누군가의 하루에 기분 좋은 발자국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럴 때면 와이프가 캘리포니아 사람 다되었다며 웃는다. 나쁘지 않은 칭찬이다. 그래도 나는  ‘이제 제법 세비야 사람 같군!’이라는 말도 듣고 싶다. 자부심이 샘솟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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