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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삭 Nov 11. 2023

스페인 알리칸테 패들보딩

여행 X 일상: 천국은 다른 곳에


엘레나(가명)는 알리칸테 토박이다. 부업으로 패들보드 강사를 하고 있다. 뜨거운 해가 조금 꺾인 늦은 오후부터 우리는 알리칸테 해안가를 누비며 엘레나에게 패들보딩을 배웠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이 멀리 산타 바바라 (Santa Bárbara Castle) 고성 위에 내려앉고, 야자수 아래서 낮맥을 즐기는 현지인들의 여유가 무르익어간다. 정겨운 고즈넉함이 느껴지는 인심 좋은 이 스페인 중부 지중해 연안 도시를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며 ‘이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잔잔한 파도 위에 두둥실 어느덧 여러 시간이 흘러가고 패들보드 체험도 끝나간다. 이제 제법 익숙해져 바닷속으로 고꾸라지지 않고도 패들보딩과 대화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기적을 시전 하니, 엘레나가 슬슬 수다를 시작한다. 엘레나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물었고, 원래는 한국에 살았지만 지금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엘레나는 캘리포니아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너무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엘레나는 캘리포니아를 꿈에 그리는 곳이라고 했다.


엘레나는 캘리포니아를 꿈에 그리는 곳이라고 했다.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너무 가보고 싶고, 살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눈에 기대와 선망이 가득했다. 내가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왜 캘리포니아가 멋진 곳인지 신나게 칭찬을 쏟아낸다. 엘레나에게 캘리포니아는 잔잔하고 적막한 알리칸테와 달리 화창한 젊음과 새로움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드는 곳이었다. 그 파도가 자신을 더 넓고 큰 세상으로 데려다줄 것이라 기대하는 듯했다.  


순간 내 내면 한 구석 불평 마귀가 그녀의 꿈을 산산조각낼 어두운 현실들을 끄집어내려 했으나, 아직 남아있는 이성의 파편이 저지에 성공한다. 내가 느낀 캘리포니아의 현실과 상관없이 엘레나의 이데아 속 캘리포니아는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곳으로 남을 권리가 있다.


일상의 파괴력을 새삼 깨닫는다.

서로를 이상향에서 살고 있다며 부러워하는 엘레나와 나를 돌아보며 일상의 파괴력을 새삼 깨닫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그곳이 일상의 반경 안에 들어오면 곧 아름다움을 잃고 잿빛으로 시들기 일쑤다. 6년간 세 나라를 옮겨 다니며 떠돌이 삶을 살았지만 이 무시무시한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먹고사는 일은 고루하고 고통스럽다.

캘리포니아도 마찬가지다.  이상 나에게 설렘을 주지 않는다. 어느덧 일상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일상이 내려앉은 곳에 당장 내일, 다음 주에 해야  일들이 쌓여 있다.  뿐인가. 관계들이 쌓이며 타인에 대한 상처와 서운함도 함께 쌓이고, 스스로의 실수와 잘못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도 쌓여 있다. 생활의 크고 작은 불편함에 대해 관용을 잃은 지도 오래다. 일상에는 생존과 인정을 위한 투쟁이 수반되고, 이렇게 먹고사는 일은 고루하고 고통스럽다.



이 아름다운 지중해 연안 마을이 일상으로 덮이면 어떻게 될까.


스페인의 대표적인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는 단조로운 일상은 무거운 외투처럼 우리를 억누르고 새로운 것, 다른 곳들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게 만든다고 했다. 이 아름다운 지중해 연안 마을이 일상으로 덮이면 어떻게 될까. 실리콘밸리의 거센 속도감에 치여 지내던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이 도시의 느린 템포, 스페인의 노곤한 햇살도 엘레나처럼 발목을 붙잡는 족쇄처럼 느껴지게 될까. 하몽 한 조각에 곁들여 마시는 리오하 와인도 맛을 잃게 될까. 나는 또 어떤 불편함과 불행에 염증을 느끼며 탈주를 꿈꾸게 될까.


 여행이 일상이 되면 이 말을 안 하고 버티기 어려워질 것 같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많은 문학가와 철학자들이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상의 작은 변화를 만들어보라는 조언도 있고, 특별히 새로운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주변의 작은 것들을 다시 주의 깊게 살펴보며 잊고 지내던 아름다움을 발견해 보라는 조언도 있다. 모두 그럴싸하다. 허나 듣기만 해도 조금 피곤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안 그래도 애쓰며 고군분투하는 일상을 더욱더 애쓰며 예뻐하기까지 하라니. 영 내키진 않는다. 그렇다고 일상을 완전히 내던지고 여행만 하며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여행이 일상이 되면 이 말을 안 하고 버티기 어려워질 것 같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여행의 연료가 예찬이라면 일상의 연료는 불평불만이다.


여행과 일상은 여러모로 너무 다른 동학으로 움직여서  둘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행과 일상은 다른 요령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여행의 연료가 예찬이라면 일상의 연료는 불평불만이다. 내일도 딱히 크게 바뀌는  없겠지만 한바탕 욕을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 같은 일상을 살고 있는 누군가가 듣는다면 격한 공감을  때도 있고, 그땐 서로의 욕을 거들며 신명이 나기까지 한다. 반면 날 때마다 항상 일상을 예찬하며 지낸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왠지  고독해질 것이고, 일상에 지친 많은 이들의 성을 돋을 수도 있고, 주변인들에겐  사람이 드디어 정신줄을 놓았다며 염려를 끼치게 될지 모른다.


캘리포니아에 대한 엘레나의 예찬은 사실 그녀의 일상에 대해 맹포화를 퍼붓기 전 인트로에 불과했던 듯하다. 한국말만 끝까지 들어야 할 게 아니다. 엘레나가 풀어내는 우울한 일상이 이상향으로서 밝게 빛나는 캘리포니아와 선명히 대조를 이루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다. ‘그래, 알리칸테가 잘못했네..’ 어느덧 우리는 패들보딩 사제가 아니라  볼 맨 소리를 편히 늘어놓을 친구가 된 기분이다.


내일도 열심히 노를 저으며 일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오늘도, 어제도 그랬듯이. 각자에겐 그저 삶의 현장이나 서로에겐 천국인 이곳에서.


각자에겐 그저 삶의 현장이나 서로에겐 천국인 이곳에서.





La Monotonía


by Antonio Machado


La monotonía es un pesado manto

que nos envuelve y nos oprime

como un paño de luto.


Es una neblina que nos cubre

y nos impide ver el mundo.

La monotonía nos hace sentir

como si estuviéramos muertos

o como si estuviéramos viviendo

en una pesadilla.


La monotonía nos hace añorar

algo nuevo, algo diferente,

algo que nos haga sentir vivos.



단조로움은

상복처럼

우리를 감싸고 억압하는

무거운 외투입니다.


우리를 덮어버린 안개처럼,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단조로움은

우리가 죽은 것처럼,

또는 악몽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단조로움은 갈망하게 합니다.

새로운 것, 다른 것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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