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에게 건네는 말
온라인 개학 후,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자기소개란에 채우면서 딸이 물었다.
"엄마, 취미는 뭐라고 적을까?"
"취미? 그냥 네가 좋아하는 거, 네가 관심 있는 것, 그런 것 적으면 되는데?"
"그런 거 없는데?"
"너 그림 그리기 좋아하고, 플루트도 배우고 있고, 그런 거 적으면 되는데..."
"나 그림 잘 그리는 거 아닌데, 플루트도 이제 배우고 있고... "
"아니, 특기가 아니고, 취미 적는 거잖아.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거, 그런 거 적으면 돼..."
"그래도..."
편하게 적어도 된다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딸은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취미와 특기. 딸에게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냐고 말했지만, 솔직히 자신 없어하는 딸의 마음이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 역시 취미와 특기앞에서 좌절했었으니까. 특기는 유독 심했던 것 같다. 특기에 대해 사전은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기술이나 기능. 이쯤 되면 특기는 정말 대단한 실력이 있거나 배짱이 있지 않는 한, 공간을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태권도 몇 단쯤 되면 쓱쓱 써 내려갈 수 있었을까? 평범한 수준의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여간 실력도, 배짱도 없었던 나는 특기를 하얀 바탕 그대로 제출했었다.
취미는 달랐을까. 취미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즐긴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취미 역시 숙제였다. 즐긴다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을뿐더러, 손 낙서 수준의 그림 그리기를 취미라고 할 수 없었고, 만화책 읽기를 취미라고 쓰는 것은 더욱 부담스러웠다. 잘하지 못해서 쓸 수 없었고, 그냥 좋아하는 것을 취미라고 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견이나 확신이 없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특기든, 취미든, 드러내놓을 수준이 되었을 때, 어떤 식으로든 특별함을 지니고 있을 때 얘기할 수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적어도 취미에 대해서만큼은 더욱 그렇다. 누군가 내게 "당신의 취미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피아노를 치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 있을 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림 그리기도 좋아합니다"라고. 나를 드러내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든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취미에 대한 의견이 보다 분명해진 것 같다. 좋은 평가를 받거나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적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 즐겨 하는 것, 스스로를 기분 좋게 만들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취미라고 명확하게 정의 내린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부모님 덕분에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교육열이 높았던 것도 있겠지만, 악기 하나 배워놓는 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거라는 실용적인 가치도 한몫한 것 같은데 중학교에 진학할 때쯤 학원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한 번도 자신 있게 특기나 취미에 '피아노 치기'라고 쓰지 못했다. 피아노 학원에 가면 나보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넘쳐났으니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기술이라고 적을 수 없었다. 오래전 기억에 한 번인가, 두 번 취미에 용기 내어 '피아노 치기'라고 적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에게서 "오, 피아노를 잘 치나 보다'라는 말을 듣고는 그 이후로 다시는 '피아노 치기'라고 적지 않았다. 부끄러운 것도 있었지만, 피아노를 잘 치지도 못하는 사람이 아주 대단한 실력자인 것처럼 오해받는 느낌에 많이 불편해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마음이었다면 당당하게 취미에 '피아노 치기'라고 적었을 턴데, '오 피아노를 잘 치나 보다'라는 선생님 말씀에 '잘 치지는 못하고 동요 정도는 칠 수 있어요'라고 용감하게 말했을 턴데.
일본에서 60대 중반의 여성들에게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가요?'라고 여론 조사를 했는데,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사람, 취미 활동이 있는 사람,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다는 대답이 나왔다. 아주 크고 거창하지 않더라도 좋아해서 즐기는 취미를 가졌으면 좋겠다. 학교 다닐 때처럼 평가받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누구보다 스스로를 돕기 위함이다.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고, 에너지를 보충해 주고, 생각을 맑게 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 일에 취미활동만 한 것이 없다.
취미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있다. 자의에 의해서든, 상황에 의해서든 혼자 있는 시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라도 취미를 만드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보자.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것이다. 어릴 때 좋아했던 것도 좋고, 잘하지는 못하지만 계속 관심이 가는 것도 좋다. 취미는 여유 있는 사람, 시간이 많은 사람, 돈이 부유한 사람이 한다는 생각도 내려놓자. 취미는 내 안으로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내 안에서 키운 기운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선순환을 일으킨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에 대해 조금만 시간과 애정을 쏟아보자.
지금도 좋고, 나중에는 더 좋을 취미, '당신의 취미'가 궁금해진다.
by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