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에게 건네는 말
승승장구(乘勝長驅), 나와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단어를 유재석의 인터넷 기사에서 보았다.
"시작하면서 승승장구한 게 단 하나가 없었습니다"
승승장구(乘勝長驅)라는 뜻을 사전에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싸움에서 이긴 기세를 몰아 계속 적을 몰아침. 적어도 이겼고, 이긴 기세를 몰아 다시 이겨나간다는 의미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긴 것에서 시작하는 단어가 승승장구(乘勝長驅)이다.
유재석이 올해로 데뷔 30년이라고 한다. 그는 <대학개그제>에서 장려상을 받으면서 연예계에 입문했고, 그 이후로 승승장구(乘勝長驅) 할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작한 프로그램마다 성과는 미비했고, '왜 이렇게 안 되지?'라는 의구심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잘되지 않는 것에 대해 자신마저 흔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붙잡았고, 평가나 성과를 떠나 꾸준히 노력하는 일에 마음을 다했다고 한다. 그의 노력은 서서히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결국 10년의 무명생활을 딛고 유재석은 2005년 첫 연예대상을 거머쥐었다.
어제는 2020년 우수 출판 콘텐츠 제작지원 사업 발표가 있었다. 5분야 2,426편이 접수되었고 137편을 선정하는데 결과는 낙방. 아쉬움이 크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위대한 명언이 있지만 열심히 달리다가 넘어진 느낌, 정체 모를 장애물을 만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내부에서 보내는 신호와 우주에서 보내온 신호가 접촉점을 찾지 못하고 살짝 비켜나간 감정을 추스르는 데 며칠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수한 시도의 연속이며 실패나 떨어지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날에는 이상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멀게 느껴지고, 침대에 누워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허공을 떠다는 기분이 든다. 뭔가 미지근한, 몇 도의 온도가 부족한지 알 수 없는 간절함이 성숙하지 못한 생각과 함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면서 말이다. 어젯밤이 그랬다.
그렇지만 알고 있다. 떨어지는 일은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적어도 내겐 그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조금이라도 나아진 모든 것에는 떨어진 경험이 거름이 되었다. 항구에 정박해있었으면 어떤 실패도 맛보지 않았겠지만, 나는 수시로 출항했었고 만선의 기쁨으로 돌아온 날보다 파도가 삼켜버린 소리에 떠밀려 되돌아온 적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런 과정은 다음날 출항을 앞두고 이렇게, 저렇게 한 번 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들었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만드는 일에 약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알고 있다.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배 이곳저곳을 매만지고, 그물을 살펴 또다시 출항에 나설 거라는 것을.
며칠 동안은 애써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을 계획이다. 떠오르는 것은 떠오르는 대로 둘 것이고, 버리고 싶은 것이 생기면 버리는 방식으로 가만히 놔둘 생각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별에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마음을 정리하는 일은 재촉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이렇게 잘 보내줘야 새로운 마음, 새로운 기운이 생겨난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실패 속에서 배웠으니까. 며칠 혼자 무른 흙을 걷다가 조금씩 단단하게 차오르는 느낌이 오면, 그때 서서리 자리를 옮겨볼 생각이다. 그렇게 시작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이니까.
by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