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끝까지 버티는 거 말고

윤슬작가 짧은 소설

by 윤슬작가

‘설마 했는데, 사직서라니...’


사직서를 꺼내며 식탁에 앉는 남편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다.

어제 귀농하여 블루베리 농사를 시작한 지 5년 된 최 씨 부부를 만나고 왔다.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공무원 김 씨 부부, 중소기업에 다닌 지 20년 된 박 씨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최 씨 부부까지 포함해 초등학교 부부 모임에서 만나 알고 지낸 세월이 삼십 년을 거뜬히 넘기고 있다. 집의 숟가락, 젓가락 숫자까지는 몰라도 두 끼를 먹고 지낸 시간이 여러 달 되었다는 것, 어지럼증이 심해 병원을 다니고 있다는 것, 아들에게 사정이 생겨 갑작스럽게 빵집을 운영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보이지 않는 선 하나가 우리를 이어주고 있다는 사실에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사이였다. 최 씨는 블루베리 농사를 하기 전에는 작지만 내실 있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사업 위기가 몇 차례 찾아왔지만 발바닥에 땀이 찰 때까지 뛰어다녔고, 타고난 예의 바름과 성실함으로 차분하게 문제를 해결해나가던 사장님이었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부부모임에서 영화를 보고 근처 삼겹살 가게에서 배고픔을 달래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그러니까 테이블 위로 다섯 번째 소주 병이 배달되어 왔을 때, 최 씨는 조금 정리되지 않은 목소리를 빠르게 쏟아내었다.

"나 회사 정리하려고 해"

“응? 뭐라고?”

“지금 회사를 정리한다고 했어?"

이런저런 자잘한 일상을 나누던 사람들이 갑자기 찬물 세례를 받은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해졌다.

“혹시, 어디 아파?”

“아니...”

"그럼?"

“갑자기 왜?"

“하긴 요새 일감도 별로 없고... 불경기이긴 하지...”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사정은 비슷했던 모양이다. 방금 비운 술잔을 다시 채우더니 서둘러 마시는 모습, 물티슈로 괜히 테이블을 닦는 모습, 징그럽다며 손에도 대지 않던 번데기를 입에 넣고 놀라는 모습까지, 술도 멀미를 하는지 술병이 흔들리고, 잔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리하고 시골 가서 농사지으면서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서...”

“다르게?”

“시골에서 농사?”

“도시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떻게 시골에서 생활하려고?"

“불경기라고 하지만, 조금 더 지나고 나면... 하던 게 낫지 않을까...?”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뜬 최 씨는 느릿하게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그래서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한번 해보려고... 여기서 끝까지 버티는 거 말고..."


"..."

“...”

"그런 생각... 나도 해보긴 했지만... "

"다 비슷할걸..."

“그런데 그게 말이 쉽지... 다들..."

“귀농, 귀농하는데, 여기보다 더 힘들다고 하더라고”

“주위에 귀농했다가 다시 올라온 사람이 그러던데, 절대 농사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고 당부를 하더라고”

"..."

“귀농 쉽지 않다는 거 나도 알지. 그래서... 지금 해보려고. 더 나이 먹기 전에... 아니면 나중에 계속 후회할 것 같아. 한번 해보기나 할걸... 맨날 그런 얘기나 하고 있을 것 같아서... 그게 더 싫은 거야...”

"자식들 대학 졸업시키고 장가보내려면 여기서 조금 더 버티는 게 그래도 낫지 않을까?"


“큰 아들 요즘 만나는 사람도 있다고 했잖아?"

"수완이한테 이야기했어. 집은 못 사줄 것 같고 전세 마련할 때 조금 보탤 줄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수완이는 뭐래?”

“뭐라고 하긴. 알겠다고 그러지”

“하긴...”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자식들 위해서 사는 거 말고,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그 생각이 몇 년 전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야... 아니야, 아니야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가 한계인 것 같아. 좀 적게 먹고, 좀 덜 쓰고,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어느 누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생각은 있으되, 쉽게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말이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그의 아내가 정적을 깨뜨려준 것이 감사할 순간이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듯, 여기저기 흩어진 생각을 모아주는 느낌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실은 이 사람이 오래전부터 얘기했어요. 육십부터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고..."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러자고 했어요. 가족을 돌보지 않겠다는 게 아니니까... 풍족하게 살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 사람... 웃는 얼굴 보면서 살고 싶어요... 요 몇 년 정말 인상파였거든요”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

최 씨 부부의 말에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남편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헤어지고 집에 오는 길에 독백인지, 고백인지, 의견을 묻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계속 내게 질문을 던졌었다. 나의 대답이 별로 궁금하지 않은지,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가능할까?”

“그렇게 해도 될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머릿속이 복잡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답 대신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가능할까?'

‘정말 가능할까?’

‘귀농? 사업 정리? 오십, 아니 육십이 코앞인데?’

‘자식들 결혼시키려면 돈이 더 필요할 턴데’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그런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머릿속에 구멍이 난 것처럼 계속 헛발 짓만 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엉킨 실타래를 풀고 싶었지만 궁색한 표정으로 남편 뒤를 밟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최 씨 부부는 어떤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사업을 정리하고 귀농했다. 이름도 낯선 경북 영천의 어느 마을로. 그러고는 5년 동안 해마다 친구들 집으로 유기농 블루베리를 보내오고 있다.


어제 최 씨 부부를 만나러 갈 때만 해도, 그리고 헤어지고 올라올 때도 어떤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예상하지 못한 친구의 부음에 장례식장을 다녀와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안정을 되찾는 모습이었고, 본래 생각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런 남편이 지금 조용히 사직서를 내밀고 있다.

"여기서 끝까지 버티는 거 말고, 지금부터라도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나 그렇게 해보고 싶어... 그러면 안 될까?..."


아주 가끔 상상하긴 했었다.

만약, 남편이 최 씨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귀농해서 살자고 말하면 나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라고 말이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큰일이다. 연습해두었던 말이 퍼뜩 생각이 나지 않고 있다.

"어... 그러니까... 당신...“


by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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