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글을 쓴 사람이든,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든, '슬럼프'는 피해 갈 수 없다. 이는 글쓰기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위기는 찾아오기 마련이고, 이는 '슬럼프'라는 이름으로 지금껏 잘 해오던 일을 뒤흔들어 댄다. 그래서 '슬럼프를 없앴다'라는 것은 틀린 말이다. 오히려 슬럼프는 없앴다가 아니라 극복했다고 말해야 한다.
슬럼프.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슬럼프 속에서 빙빙 헤매지 않고 그 순간을 잘 견디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돌아보았을 때 무엇보다 온몸이 얘기하는 '지금 슬럼프에 빠졌어'라는 신호를 인정하는 게 중요해 보인다. 슬럼프가 아니고, 변덕이라고, 게으름이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감각을 열어두고, 마음과 몸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나 또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지박약이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하고, 게으른 모습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재능을 운운하며,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뭔가를 찾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계절을 반복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판단하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슬럼프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에는 가능한 자유를 허락했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글을 쓰지 않는다고 나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걷고 싶다면 걷기를 격려했고, 평소보다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에도 화내지 않았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교감신경이 작동하여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든,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두려움이든,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내 몸을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갑자기 소화가 다 되었는지 배가 고파지면서, 뭔가를 끄적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겨났다. 그때는 메모가 되었든, 글이 되었든, 정신없이 쏟아부었는데, 한참 그러고 나면 뱃속이 따듯해지면서 충만한 기운이 아래쪽에서부터 올라왔다.
사실 이즈음이 되면 큰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그때부터는 조금씩 나의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글이 잘 써졌던 공간, 집중력이 어느 때보다 발휘되는 시간을 기억해 내어 그곳으로 나를 옮겨주어 조금 더 상태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이 느껴지면, 가끔은 그런 방식을 쓰기도 했다. 먼저 혼자만의 약속 같은 것으로 작은 목표를 세워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예를 들어 매일 포스팅하기를 적어놓고, 하루하루 체크를 한 다음 금요일에 모두 완성하면 보상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가거나,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주문하지 못했던 것을 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는 보상 장치를 활용했다. 물론 보상장치도 상황에 따라 진화했고, 그때그때마다 희망하는 게 달라지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제법 효과가 좋았다.
슬럼프는 결코 쉽지 않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상황에서든 마주할 수밖에 없다. 벗어나고 싶고, 심적으로 부담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꾸준한 노력에도 변화가 없는 것 같은, 더 상황이 나빠지는 것 같은 기분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피하고 싶다고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것이라고. 차라리 슬럼프가 왔을 때 그것을 퍼뜩 알아차릴 수 있도록 감각을 열어두는 일에 더 신경을 쓰기로. 그러면서 큰 동요 없이 툭 말을 건네기로.
"혹시? 슬럼프? 네가 온 거니?"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