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운 Jun 26. 2024

여름의 빌라

여름날 이사를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언덕배기에 있는 집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을 오를 가족들의 뒷모습을 떠올려 본다. 벌써부터 후덥지근하다. 그래도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이사하게 되어 다행이다. 장마철에는 몸이 늘어지고 마음이 연약해지기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물조심, 음식조심, 사람조심. 여름에 난 상처는 겨울이 될 때까지 잘 아물지 않는다.  


새집은 다섯 식구가 살기에 턱없이 좁은 집이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점점 작아지는 집에 엄마는 울상이고, 아빠는 웃상이다. 나는 무념무상. 아빠는 민망하거나 혹은 미안할 때 말도 안 되는 유머로 상황을 모면한다. 이건 초능력에 가깝다. 화가 난 엄마의 얼굴에 웃음을 번지게 하니까. 나는 그에게 배운 기술로 곧잘 엄마를 웃게 할 수 있다. 엄마는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는다. 간혹 웃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그녀의 웃음엔 의문스러운 구석이 많다.


새집에는 햇빛이 잘 든다고 한다. 너무 반가운 소식이다. 현재 거주 중인 집은 1층 같은 반지하라서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 그나마 빛이 드는 곳은 주방의 작은 창문뿐이다. 오후 12시쯤에 주방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은 정말이지 즐거웠다. 새벽이 되면 베란다 창문 너머로 길고양이의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다. 은밀한 몸짓과 한껏 올라간 꼬리. 이렇게 귀여운 새벽을 맞이하기도 했다. 


비록 두 개의 반려 식물을 떠나보냈고 선물로 받은 썬캐처는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날들이었다. 이토록 선명한 행복은 기억에서 잘 사라지지 않는다. 사소한 것을 잊지 못하는 성향이 이럴 때 빛을 발한다. 물론 흑역사가 떠올라 이불킥을 할 때가 훨씬 많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선명한 행복만큼 선명한 불행도 있었다. 햇빛이 필요한 건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에는 너무나 많은 한숨과 눈물이 부유하고 있다. 밖에서 집 안이 보일까 창문을 꽉 닫고 있었으니 환기 시킬 틈도 없었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흰색 화분과 방울토마토 씨앗을 구매할 계획이다. 물감으로 화분에 해파리와 거북이를 그려 넣을 거다. 바다를 떠다니는 토마토. 꽤 낭만적인 풍경 아닌가. 낭만 하나 품는 일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니. 시련 하나, 낭만 하나. 하나씩 지워나가 보는 거다. 


여름의 빌라에서 어떤 추억들이 쌓일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이곳에서는 엄마의 웃음을 의심하고 싶지 않다. 찰나에 스치는 그녀의 민낯을 못 본 척 넘어가 보려 한다. 하지만 엄마는 꼭 내가 그린 자화상 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엄마에게도 낭만 하나를 심어줄 수 있는 물렁한 마음이 존재하기를.  

이전 01화 초여름을 사랑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