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여름날에 생각나는 음료가 하나 있다. 바로 생맥주다! 음료라 하긴 뭐하지만,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면 다 음료 아니겠나. 여름에 마시는 생맥주에는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 갈증뿐만 아니라 묵은 체증까지 내려가는 느낌이다. 크으으. 죽상을 하고 있던 두 취준생이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이다. 겹겹이 쌓인 고민을 가성비 있게 밀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 셈이다. 일단 마시자! 우리는 서로의 어두운 낯빛을 뒤로하고 맥주를 들이킨다.
열 많고 땀 많은 사람이 생맥주 하나 때문에 여름을 기다릴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닐까. 부드러운 거품과 목을 간지럽히는 탄산까지. 운이 좋은 날에는 꽁꽁 언 맥주잔을 받기도 한다. 나는 아이스팩을 받아든 사람처럼 두 손으로 맥주잔을 쥐고 행복해 한다. 살얼음이 녹으면서 물기가 생기기 때문에 휴지 서너 장 겹쳐 밑부분을 받쳐들어야 한다. 음식은 손이 많이 갈수록 맛있어진다. 맥주도 예외는 아니다.
한 잔, 두 잔, 세 잔..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너 하나, 나 하나. 서로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얘기를 꺼낸다. ‘그런데 있잖아, 사실은’과 같은 부사가 붙으면 대화는 급속도로 깊어진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며 웃던 우리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인생에 대해 고민한다. 삶은 뭘까? 넋두리에 가깝다. 삶은.. 계란이라는 농담을 까마득하게 잊은 채 무거운 말들이 오간다. 이제 맥주 한 잔으로 고민을 털어낼 수 없게 된 걸까. 그럼에도 우리는 잔을 부딪힌다. 짠! 잔이 부딪칠 때마다 마음에 금이 가고 그 사이로 비밀이 하나둘 새어나온다. 이게 바로 여름 생맥주가 주는 마법이다.
지나친 음주가 몸에 해롭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매일 몸에 힘을 주고 지내다 보면 알코올이 주는 느슨함에 기대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함께 잔을 부딪힐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아마 내일도 집 가는 길에 친구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말할 거다. 생맥주 한 잔? 우리는 익숙한 가게에 앉아, 당연하게 생맥주 두 잔을 시키고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끝으로 여름에는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날이 너무 더워 음식이든 사람이든 쉽게 상하고 물러진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고민은 상했을 확률이 높다. 상한 음식을 뱉어내듯이 상한 마음도 뱉어내야 한다. 그렇게 비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맥주인지 모를 것을 계속 닦아내다 보면 이번 여름도 지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