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참깨 Sep 10. 2023

‘무빙’의 이미현이 안경을 쓰는 이유

 최근 아껴가며 보고 있는 드라마 ‘무빙’에는 여러 초능력자들이 등장한다. 그중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초능력자 이미현은 평범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정보를 수집한다. 미세한 기계음을 감지해 숨겨진 카메라를 찾아내고, 다른 층에서의 대화를 듣고,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김밥을 먹는 남자를 발견하고, 돈가스 소스를 한 입 찍어 먹어보곤 안에 들어간 재료를 모두 알아낸다.


 드라마 소재로 쓰일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아이들과 교실에 있을 때의 나는 거의 이미현급의 감각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살았다. 아이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매시간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 표정이 해결되기 전까지 나도 함께 불편했다. ‘아침에 엄마랑 싸운 걸까’라는 러프한 추측, ‘며칠 전에 다툰 친구와의 갈등이 아직 해결되지 않을 걸까’하는 기존 정보에 기반한 추론, ’단지 내 수업이 재미없어서일까‘하는 자괴감까지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하교 때까지 아이의 얼굴에 불편함이 가시지 않는다면 아이를 불러 슬쩍 물어본다. “혹시 선생님한테 털어놓고 싶은 거 있어?”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하는 행동, 나누는 말들이 전부 보이고 들렸다. ‘ㄱ이가 놀이에서 지고 있네. 저대로 놀이가 끝나면 아마 또 화를 많이 낼 텐데’, ‘ㄴ이가 책을 읽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친구들 대화에 끼고 싶어하네‘, ‘ㄷ이랑 ㄹ이 둘이서만 화장실에 갔네. 남겨진 ㅁ이는 역시 표정이 좋지 않군.’ 아이들이 나름 소리 낮춰 나눈다는 수다도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있는 내 귀에 실시간으로 꽂혔다. 부모, 형제, 자매, 친구들 이야기와 옆 반, 학원, 동네에서 일어난 일들을 제발 조금은 모르고 싶었다. 20평 남짓의 숨을 곳 없는 교실에서 아이들은 내게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온몸으로 발신하는 무한한 신호를 소화해 내느라 매일 고단했다.


 고성능의 레이더를 동시에 가동하는 일은 분명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지만 이점도 없지 않았다. 아이들과 한 달 남짓 생활한 후 가지는 학부모 상담은 항상 시간이 모자랐다. 내가 한 달 동안 관찰한 결과 가지게 된 아이에 대한 기대감과 우려감을 나누다 보면 금방 정해진 시간이 끝나곤 했다. ‘저희 아이에 대해 정말 잘 알고 계시네요’라는 말도 자주 들었다. 아이들은 털어놓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고민에 대해 상당 부분을 내가 알고 있다는 점에 놀라곤 했다. 그런 아이에게는 ’원래 선생님들은 그냥 다 알아‘라고 덤덤히 말해주었다.


 해결되지 않은 다량의 정보들은 퇴근 후 일상까지 파고들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려 샤워기를 틀면 아이들의 고민과 상처들이 쏟아져 나를 때렸다. 샤워를 하며 그렇게 자주 울었다. 침대에 누워 그것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내 부족함을 끌어당겨 덮고 누웠다. 매일 밤 이불이 무거웠다.


 왜 좋은 직업을 그만두었냐는 질문에 나는 여전히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한다. 학교의 고질적인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설명하기 쉬워졌다. 개인적인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도 덧붙여야겠지만 늘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매일 다른 얼굴을 하고 내게 왔던 아이들과 사정들을 여태껏 잊지 못한 채 떠올리곤 한다. 이미현이 지나치게 좋은 시력을 가리기 위해 쓰고 다니는 안경을 보고 생각이 많아질 뿐이다.

이전 13화 교사들이 왜 자꾸 죽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