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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깨 Nov 14. 2023

오래 덮은 침구 같은 말들 속에 다시 폭 안기는 것 2

 (앞 편에서 이어집니다.)


4

 가끔 L을 떠올릴 때면 중앙도서관의 사계절 내내 서늘한 공기가 함께 느껴진다. L을 가장 자주 만났던 곳은 당시 다니던 대학의 중앙도서관이었다. 평일이면 어김없이 그는 도서관 어딘가에 있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 도서관을 애용하기로는 나도 L에게 뒤지지 않았다. 주간지 코너를 훑어보다가, 서가를 서성이다, 열람실에 앉아 있다 보면 종종 L에게 연락이 오곤 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하기도 했다. 도서관 앞 매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날이 좋은 날에는 도서관 주변을 크게 둘러 걸으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이야기, 책 이야기, 팟캐스트 이야기.


 언제부턴가 나는 L에게 ”그 책 읽어봤어요?“라고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알거나 읽은 책 중 그가 먼저 읽지 않은 책은 거의 없었다. L은 언제나 한 발 내 앞에 있었다. 영화도, 팟캐스트도, 최신의 시사 소식도 마찬가지였다. 학부 졸업을 위한 논문을 쓰고 있던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내어 취미를 향유하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그가 조르조 아감벤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감벤의 책을 구해 읽은 적이 있다. 페이지를 몇 장 넘기지 못한 채 포기해 버린 기억.


 L과는 10년 전쯤 연락이 끊겼다. 졸업을 전후한 시기였다. 어디에서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요즘처럼 소셜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에 드물게 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나에게 서뿐만 아니라 함께 알고 지내던 친구들에게서도, 홀연히.


 C에게 L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는 이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L과의 대화는 “가장 자유로운 대화의 형태”였다고. L과 대화할 때 나는 쓰고 싶은 어휘들을 마음껏 골라 쓸 수 있었다. 책에나 나올 법한 어휘를, 젠체한다는 비난받을 걱정 없이 마음껏 말했다. 나는 그 당시 유행했던 “적확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입에 올렸다. 이제 와서는 조금 민망하다. 비유를 쓸 때도 자유로웠다. 이를테면 그와 대화할 때 “오래 덮은 침구 같은 말들 속에 다시 폭 안기는 것”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면 굳이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검열하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어느 해에 L은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한겨레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장강명 작가의 ‘표백’이었다. 중앙도서관 매점 앞 긴 회랑엔 초가을 초저녁의 바람이 흩날리고 있었다. 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판본의 책을 받아 들었다. L은 자신이 읽던 책이니 편히 받으라고 했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좋은 책이라면 몇 권씩이라도 사는 사람이었으니깐.


 그 책을 읽고 나는 어딘가에 짧은 서평을 써두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무엇도 알아채진 못했다. 이제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다. 그 책을 통해 그가 내게 전달하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가 사라지고 10년 동안 그와 나눈 말들을 곱씹다 보니 이제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은 고도로 함축적인 메타포가 되어버렸다. 도서관, 매점, 나꼼수, 표백, 장강명.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만큼, 그가 무엇을 읽어왔을지가 궁금해진다. 무엇을 읽고 무엇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5

 어쩌다 보니 C에게 L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C도 똑같이 내게 가장 편안한 대화상대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C를 처음 만난 것이 15년 전이었으니, 꽤나 오래 걸린 깨달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L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한 것도 C가 처음이었다. C와 대화할 때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글을 읽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들릴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C에게 ”생득적“이라는 표현을 넣은 문장을 말하고 아주 큰 만족감을 느꼈다. 보통이라면 대신 여러 필터를 거쳐 “선천적” 혹은 “타고난”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C와 L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버전의 나를 자유롭게 펼쳐 보일 수 있었다. 그들이 내게서 보기를 원할 것 같은 가면이 아닌, 내가 보여주고 싶은 가장 편안한 가면을 마음껏 썼다. 섬세하게 커스터마이즈 한, 가장 ‘나답다’고 느껴지는 가면을 쓰고 쉴 새 없이 조잘댔다. 그럼에도 C는 자주 내게 예의 바르다고 말한다. 예의 바른, 무례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6

 내가 이주하게 될 도시의 도서관 웹페이지에 들어가 한국어 도서 목록을 찾아보았다. 1000권이 넘는 한국어 원어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이만하면 됐다. 1000권이면 10년도 거뜬히 버틸 수 있다. 도서관을 이용하든 아마존 배송이든 책을 공수하기는 쉽다. 그렇다면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말들을 나눌 대화 상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C와 L 같은 누군가를 새로운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미 잘 안다. 이 질문에 담긴 바람은 사치이자 욕심이다. 대신 “앞으로 우리가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끈질기게 잡고 살아야겠다. 떠나기 전에 몇 번이 아니라, 온 생을 통틀어 여러 번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러려면 C도, L도, 그리고 나도 남은 생을 끈질기게 살아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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