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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깨 Nov 21. 2023

계절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1

1

 틈틈이 짐을 줄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규격이 정해진 수하물 6개로 이사를 마치려면 필수적인 것 이외에는 남김없이 처분해야 한다. 작은 집에 살다 보니 미니멀리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는데도 곳곳에서 잊고 있던 물건들이 나온다. 가장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옷이다. 많은 집들이 방 하나쯤의 점유권은 오롯이 옷에게 내어주지 않을지. 우리집도 마찬가지다. 이제 더는 보관의 명분도, 방법도 없다. 곤도 마리에의 말처럼,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면 과감히 보내야 한다.


 겨울용 버킷햇을 버린 것은 잠깐 후회했다. 겨울용으로는 방한 기능만 있는 골무 모양의 모자만 남겨놓았는데 오늘처럼 구름 없는 날에 걸으려니 챙이 있는 모자가 아쉬워졌다. 고민 끝에 여름에 잘 쓰던 라탄 재질의 선캡을 둘러썼다. 겨울 초입의 계절에 빵빵한 푸퍼 패딩을 입고 휴양지 느낌이 물씬 나는 선캡을 쓰자니 아무래도 어색했다. 그래도 아이보리 패딩과 컬러 톤은 잘 맞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바깥으로 나갔다. 상반된 두 계절을 몸에 걸치고 있다는 자각이 글을 쓰기 위해 카페까지 가는 길에 졸졸 뒤따라왔다.


 결코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스스로에게 쓰는 신경이 10이라면, 타인이 내게 쓰는 신경은 거의 0에 수렴한다는 것을. 하지만 대체로 ’정상‘의 범주 안에 들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정상과 이상 사이의 경계를 늘 의식한다. 라탄 선캡을 쓰고 패딩을 입는 것이 정상의 범주를 넘는다고 말하기에는 야박하지만, 만약 그런 차림의 나를 보고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으로써 바로 실패다. 내가 만나는, 내가 아는, 어쩌면 나를 모르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정상이라고 여길만한 행동만 허락된다. 정상의 범위는 점점 좁아진다.


2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매일 보던 일일 드라마가 있었다. 자매가 형제와 각각 결혼하는 이야기. 겹사돈 스토리의 시초 격인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에서 둘째 딸 역할로 나오던 배우가 회색톤의 멜빵바지에 통굽 로퍼를 대유행시켰다. 그 패션이 초등학생 사이에서 엄청나게 인기였다. 내 친구들은 통이 넓은 멜빵바지를 입고 긴 바짓단을 자르는 대신 통굽 로퍼를 신었다.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무거운 통굽 로퍼를 신었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잘 믿기지 않지만, 어쨌든 그때는 모두가 그랬다. 학교에서는 실내화를 신어야 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지만 다니던 성당에 가면 여자 아이들의 키가 모두 반 뼘씩 커져 있었다.


 그때 그 통굽 로퍼가 정말 갖고 싶었다. 나만 평범한 흰 운동화를 신고 있다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드라마가 초등학생들의 ’정상‘의 범주를 휘저어 놓았었다. 그 신발을 신지 않는 것은, 그러니까 열두 살 아이가 7센티 정도의 통굽 신발을 신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결국 엄마를 조르고 졸라 로퍼를 샀다.


 아이러니인 것은 내가 유년기 동안 남들보다 눈에 띄게 큰 키를 늘 콤플렉스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정규분포의 도톰한 가운데에 자리잡지 못했다는 것을 매일 자각하며 살았다. 정말이지 남들과 비슷하게 작아지고 싶었다. 그런 내가, 내 키를 7센티는 더 크게 만들어 줄 통굽 로퍼를 신고 다녔다. 그걸 신지 않았다면 7센티씩 커진 친구들 사이에 포근히 묻힐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키는 연속된 분포라도 있지만 통굽 로퍼는 그야말로 있음/없음의 세계다. 분포의 끝에 위치하는 것과 ‘없음’의 세계에 속하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계속 분포의 끝에 남을지니.


3

 라탄 선캡은 카페에 들어가기 전에 벗어 백팩에 넣었다. 쑥색의 백팩은 남편의 것이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없다는, 아마 20년도 더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남은, 나도 당시에 하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이스트팩 백팩이다. 문득 지난여름의 가족 여행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가 모래 놀이를 하고 있던 호숫가의 모래톱은 땡볕이었다. 아이와 놀아주던 남편이 그늘에서 쉬고 있던 내게 다가와 내 라탄 선캡을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안 되는 일이라며 대신 쑥색 이스트팩에 들어 있던 남편의 볼캡을 건넸다. 남편은 볼캡은 챙이 작아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을 다 막아주지 못한다고, 내 선캡을 고집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남편은 결국 내 선캡을 쓰지 못했다. 왜 안 되느냐고 묻는 남편에게 뭐라고 대답했더라. 이제 와서 그 대답을 다시 해본다면 ‘당신이 여성용 선캡을 쓰고 있는 것은 통굽 로퍼들 사이의 내 흰 운동화 한 켤레와 같다’쯤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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