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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깨 Nov 28. 2023

계절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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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의 바뀜을 느낄 때마다 고등학교 때 배운 한국지리 내용들을 떠올린다. 7월 즈음, 먼 남쪽의 태평양에서 부글부글 일지 않고서야 이렇게 뜨겁고 축축한 공기가 될 수 없다 싶을 때 여름이 된다. 11월 즈음에는 무방비한 채 뺨을 할퀴는 바람에 당하곤 한다. 태생이 시베리아쯤은 되어야 이렇게 날카로워질 수 있는 거지. 겨울이 온다. 남쪽과 북쪽의 이국에서 흘러 들어오는 거대한 공기덩어리가 대륙의 끝 작은 반도에 엉덩이를 깔고 내리 앉는다. 몇 달 동안 꿈쩍하지 않고 눌러앉아 재미를 본다.


 엊그제 즈음 소리 없이 시베리아 자객이 흘러들어왔다는 것을 느끼며 식당에서 순댓국을 먹고 있었다. 볼륨을 죽인 티비 뉴스 화면에서는 수능 문제지가 각 지역으로 배송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이맘때 즈음 푸른 얼음빛을 머금은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수십만의 수험생이 떨고 있는 시점에 하필. 떠올려 보면 십수 년 전 이맘때, 수능 결과에 절망한 나를 괴롭히던 바람도 같은 곳에서 불어온 것이었다. 그 해 수능은 한국지리가 유독 어려웠다.


5

  가혹한 계절의 맹공에 맞서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실내에 밀폐시킨다. 단열과 방음 기능을 갖춘 창을 골라 비싼 돈을 들여 시공한다. 소리, 바람, 습기, 먼지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집 안에 단단히 갇히는 것이다.


 살갗에 닿는 계절이 더 이상 예전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기후 위기를 곱씹는다. 밀폐로 인한 해방은 이제 생존을 목표로 한다. 스스로를 가둔 우리는 그 안에서 각종 가전들을 가동한다. 에어컨, 선풍기, 서큘레이터, 제습기, 전기장판, 각종 난로, 그리고 공기청정기. 여러 대의 전기 제품들이 자리만 바꿔가며 사계절 가동 중이다. 살기 위해서, 그래도 우리가 사는 집만큼은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옅은 백색 소음을 무음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6

 우리가 가려는 나라에는 총이 있다. 언제나 안전을 생각하라는 우려 섞인 말들을 종종 듣는다. 절대 ’함부로‘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는 충고도 들었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유는 함부로 나가고, 함부로 나가서 걷고, 함부로 뛰고, 함부로 놀 수 있는 상태를 말하니깐. 함부로 돌아다녀도 안전하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니깐. 안전 때문에 자유가 제한되지는 않을지 나도 덩달아 걱정이 된다.


 치안하면 대한민국이지, 라고들 말한다. 안전한 나라, 깨끗한 나라. 범죄가 적은 나라, 밤에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 하지만 나는 또 묻고 싶기도 하다. 1년 전 가을, 그렇게 안전하다는 서울 한복판의 거리를 걷다가 100명이 훌쩍 넘는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왜 그 일은 잊거나 묻어두냐고. 배가 침몰한 10년 전 봄의 일은 어떻고. 지하차도가 물에 잠긴 지난여름의 일은 또 어떻고.


 너무나도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거리 두기가 어렵기 때문에 외면하고 싶은 걸까. 작은 나라에 부대끼고 살아서? 몇 집만 건너면 닿을 곳에 피해자가 있을 것 같아서? 몇 집을 거꾸로 거슬러 다음번엔 우리 집일 것 같아서? 그래서 ‘함부로’라는 프레임을 씌워버리는 걸까. 그건 함부로 돌아다닌 네 탓이야. 함부로 그날 거기에 있었던 네 탓이야. 함부로 자유로웠던 네 탓이야.


7

 그래. 나가지 말자. 살기 위해 문을 잠그자. 역시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되는 거다. 나다니지 말자. 집이 제일 안전하지. 집만큼은, 집만큼은.


 외벽이 떨어져 나간 아파트를 보면,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철근의 행방을 궁금해하다 보면 여기에서 산다는 것이 곧 ‘함부로’가 되어 버리는 세상을 만난다.


 겨울의 초입이면 늘 수납장 깊숙이 있는 가습기의 존재를 떠올린다. 몇 해 동안 버리지도 틀지도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필수 가전. 아프지 말라고, 더 따뜻하라고, 더 안온하라고. 누군가를 돌보던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다. 채 집계되지 못한 죽음들이 우리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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