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마지막 영어 선생님
영국 드라마 중에는 셜록홈스를 가장 좋아한다.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를 비교하는 유튜브 영상을 좋아한다. 하지만 특별히 영국식 영어에 대한 선호도는 없다. 몰타는 영국의 식민지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은퇴한 영국인들이 많이 살고, 영국식 영어(라고 하지만 몰타식 영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를 상용한다. 내가 다닌 LSC 몰타 어학원도 본점은 영국에 있다. 그래서 영국이나 영국의 식민지 시절을 겪은 나라에서 온 많은 선생님들이 계신다. 나는 그중에서 앞서 소개한 남아공 출신의 Lee와 영국 출신의 Andrew의 수업을 가장 오랫동안 들었다. 격 없이 자신을 대하기를 바랐기에 집에서 함께 와인을 마시며 인생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친근한 Lee와 달리 Andrew는 선이 분명하고 베일 속에 감춰진 사생활을 가진 선생님이었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백인 우월주의에 가득 찬 서양인일 것이라고 오해했었는데 그는 지금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은 지식인이자 훌륭한 선생님이다.
그의 수업은 늘 기사문으로 시작했다. Gardian지의 Main news를 함께 읽고 모르는 단어를 알아보고 생각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수업을 들으며 시사 상식과 같은 배경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신 학교나 성적 등을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평소에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수업은 정직해서 좋았다.(?) 특히 ‘Reading’ 수업을 할 때마다 발음 교정을 많이 해줬다. 늘 나에게 이야기했던 부분은 내가 ‘R'소리와 'L'소리를 발음할 때 두 소리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나의 영국 신사 선생님은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R'은 ‘L’과 달리 입술을 깨물듯이 소리 내라고 하셨다. 하지만, 문장 속에서 'R'이 들어있는 단어를 발음하려고 하면 금세 잊어버리고 오랜 습관처럼 소리 내곤 했다. 하지만, 세심하게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정말 고마웠다.
‘Reading’ 수업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아마 초반이었을 거다. 내 차례가 되어 기사문을 읽기 시작했고, 나는 선생님이 영국 사람이니 최대한 영국 발음으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라 함은 'T'소리를 강하게 내는 것! 하지만 나의 기사문 읽기가 끝나자마자 선생님은 "Yeji, you have accent like American"라고 하였다. 아주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아니, 그래도 미국 억양이라고 해줘서 고마워해야 할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마저도 몇 개월이 지나자, "Yeji, why do you have Korean accent now?"라는 말에 좌절했지만 말이다.
어학원에서는 주기적으로 선생님들과 수업에 대해 개별 상담을 진행했다. 한 번은 Andrew와의 개별 상담 시간에 진지한 분위기를 조금 깨보고자 ‘itchy feet(역마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가 인생 상담을 할 뻔했다. 내가 성격이 좀 급하고 텐션이 높은지라 침착하고 이성적이며 냉정해 보이는 사람들의 냉철함을 닮고 싶을 때가 있는데 Andrew가 딱 냉철함이라는 단어가 사람으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2주 정도 온라인으로 Andrew의 수업을 더 들었다. 이미 수료증도 받았고, 시험도 출석과 관련된 서류도 회사에 제출한 뒤였지만, 정이 든 선생님의 수업을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 때, 덕담을 무제한으로 해주셨다.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던 선생님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보며 나도 눈물을 삼켰다. 외국에서 1년 살다 보니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마땅찮지 않을 뿐이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정’이 드는 것은 세상 어딜 가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