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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하 Jul 24. 2021

1. '20만 원'으로 결혼한 경제관념 꽝인 엄마

 지금의 남편이 결혼 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 내 통장에는 단돈 20만 원이 있었다. 당시 내 나이 서른한 살. 학창 시절에 학자금 대출을 받아 본 적 없었고 그때 당시 직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 사치를 했을까? 글쎄. 그 나이 먹도록 명품 가방 하나 사 본 적도 없다. 그럼 도대체 서른한 살 되도록 돈 한 푼 못 모으고 뭘 했단 말인가.


 20대 중반까지도 나는 내 적성에 대해 무지했던 탓에 20대 내내 여러 직업을 거쳤다. 대학 졸업 직후, 외국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했다. 여행을 좋아하고 사교적인 성격인 내게 승무원이 천직일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내 적성과 서비스직에 교집합이 없다는 걸, 힘든 교육과정을 마치고 첫 비행을 하자마자 알게 되었다. 결국 오래 일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래저래 방황하다(외국계 회사에 취업해 일은 했지만 심적으로 많이 어지러웠다.) 27살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아나운서 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일종의 언론고시라 불리는 시험을, 일을 하면서 짬을 내 준비해서는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해 보여 백수가 되는 공포를 무릅쓰고 또다시 회사를 나왔다. 그간에 모은 돈을 모두 털어 아나운서 준비에 쏟아부었는데 아나운서 준비에는 돈이 정말 많이 드는 관계로 (일단 학원비부터 쓸데없이 너무 비싸다.) 통장 잔고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었다. 마음은 초조한데 당시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어 경기마저 얼어붙으며 방송사 채용기근이었다. 하지만 1분 1초를 아껴가며 준비했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던 건지, 어찌어찌 운이 좋게도 그 해에 K본부 지역사 아나운서로 합격했다. 마지막 면접을 보러 간 날, 통장 잔고에는 5만 원이 남아 있었다.


 아나운서는 내 적성과 교집합이 99%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방송국에 한 발을 내딛자마자 여자 아나운서의 수명이 짧다는 현실(요즘도 그러하지만 10년 전쯤엔 더 했다.)을 직시하게 되었다. 방송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내가 내린 선택은 간단했다. 콘텐츠를 단순히 전달하는 능력을 넘어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내 나이 스물아홉. 다시금 백수 상태로 서울로 올라와 기자 시험을 준비했다. 아나운서로 일하며 모았던 돈을 다 까먹고 부모님께 생활비까지 지원받으며 준비를 했다. 두려움의 공포가 하루가 다르게 엄습하는 자취방에서, 서른을 한 달 앞두고 한 방송사에서 합격 전화를 받았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마치 한풀이하듯, 20대에 누리지 못한 ‘직장인의 사치’ 서른 살부터 본격적으로 부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돈을 제대로 쓴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명품 가방이라도 하나 샀으면 돈 쓴 티라도 났을 텐데 방앗간처럼 드나들었던 편의점, 올리브0 등의 편집숍에서 매일같이 돈을 줄줄 흘리고 다녔다. 퇴근길에 로드샵을 습관처럼 들렀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택시를 밥 먹듯이 타고 다녔다. 안 그래도 쥐꼬리만 한 월급에 경제 개념조차 없었으니 다음 달 카드 값을 메울 수나 있으면 다행인 삶이었다. 그런 와중에 은행 직원의 아주 친절한(?) 권유로 리볼빙 제도를 활용하게 되었고 무시무시한 이자 수수료의 늪에 빠져들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있었으나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 헤매던 와중에, 만난 지 반년 정도 된 남자 친구가 결혼 얘기를 훅 꺼냈다. 결혼? 무일푼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에 무임승차할 만큼 양심이 없지도 않았기에 주저 없이 핸드폰의 ‘00은행’ 앱을 열어 내 통장의 잔고를 극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잔고는 20만 원. 돈을 모으고 난 뒤에 결혼을 해도 하겠다고 칼같이 선언했는데 남자 친구는 자기가 모아놓은 돈이 있으니 그걸로 결혼 준비를 하면 된다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결혼을 밀어붙였다.


 옛말 틀린 것이 없었다. 결혼은 남자가 하는 것이었다. 남자 친구의 적극적인 공세에 떠밀려 어느덧 나는 결혼식장에 서 있었다. 다행히 살고 있던 오피스텔 전세자금을 결혼자금으로 주신 부모님 덕분에 (부모님은 늘 결혼 자금은 스스로 모아서 가라고 말씀하셨기에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결혼 직전, 양심은 지키며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결혼 이후 남편은 도대체 경제개념이 없는 내게 무슨 배짱인지 월급을 믿고 맡겼다. 그런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한 가정을 이루고 가계의 경제를 책임지는 위치(?)에 서게 되니 돈을 모아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본격적으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계부의 함정이 무섭다. 가계부를 쓰다 보면 정말 ‘글로 쓰는’것에만 충실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지출내역을 한눈에 살피게 해 어느 정도의 소비는 소극적으로 막아주지만 생활습관과 소비 패턴을 180도로 바꿔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 소비하는 것도 습관이다. 습관을 바꾸는 것은 ‘조금 아껴보자.’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 가치관의 변화 등이 수반되어야 이루어낼 수 있는, 지독한 관성을 거스르는 행동 양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적인 가치관의 변화는 임신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그 변화의 기저에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 아이의 인생을 경제적으로 온전히 책임져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무엇보다, 사교육 시장이 과열된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교육시키는 것이 암담했다. 한때 교육 분야를 2년간 취재한 적이 있었기에 이러한 두려움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는데 나에게는 사교육을 철저히 무시할 강단도,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감당할 돈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임신 직후부터 소비 습관을 바꾸겠다는 굳은 결심이 서게 되었는데 문제는 역시나 ‘방법’이었다. 아무리 의지가 확고해도 변화의 방법을 모르면 작심삼일로 끝나기 마련이다. 때문에 절약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터득하기 위해 관련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놀라운 통찰과 깊이 있는 지식이 담긴 고귀한 서적들도 많지만 다산 정약용 선생의 찐 실학정신을 이을만한 실용서적들 역시 넘쳐났다. 입이 떡 벌어지는 절약의 고수들을 책을 통해 만나며 나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책 속에는 진짜 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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