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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쓸 Oct 17. 2021

우리의 부부싸움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읽기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 지음, 새물결, 1999


시작은 대부분의 싸움이 그렇듯 평범했다. 나는 남편이 식사한 그릇을 식탁에 그대로 둔 것을 지적했고, 남편은 나의 지적에 서운함을 표시했다. 온라인 개학으로 바빠진 학교와 대학원 과제에 지쳤고, 어쩌다 한번 그런 것 아니냐고. 식사한 그릇을 식탁에 그대로 둔 것이 한번인지 여러번인지, 오늘 아침 왜 야구르트 봉지를 바닥에 버렸는지, 아이가 먹다 남은 그릇을 치운 사람이 누구인지,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아이의 육아와 직장-학업의 병행 중 무엇이 더 힘들고 중한지, 긴 언쟁이 이어졌다.


언쟁 끝에 남편이 말했다.


“너는 돈을 벌지 않잖아.”


그 말에 분노가 터져버렸다. 현재 나는 임금노동을 하지 않으며, 남편보다 육아와 가사를 더 많이 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남편의 ‘돈’ 발언은, 발언의 사실관계를 넘어 임금노동을 하는 자신의 우위를 표시하려는 의도로 들렸다. 설사 남편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해도,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을 둘러싼 사회적 함의가 그렇다.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육아와 가사라는 분명한 노동을 함에도 나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된다. 나는 이틀간 남편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분노로 잠 못 이루던 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매우 정상적인 혼란> 책을 펼쳤다. 책의 저자들은 말했다. 사랑에는 언제나 이런저런 긴장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내가 겪고 있는 일은 독특한 개인적 드라마가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대도시에서 다양한 언어로 공연되고 있으며, 무대를 달리해서 계속 초연되지만 소품은 언제나 같다’(26쪽)고. 이 드라마는 나와 남편의 성격, 실수, 부주의가 아니라 ‘서로 모순된 두 사회적 역할 간의 충돌’(24쪽)로 빚어지는 일이라고. 


'지금 내 얘기 하는거야?' 급격히 책에 빨려들어갔다. 



남편은 그에게는 가능한 직업 생활과 육아의 공존이 나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평등'은 남편에게는 더 많은 가사노동, 싸움, 번뇌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동반자이며 가장 가까운 친구인 남편과 엄청난 간극을 확인하는 일, 매일 싸우며 서로의 바닥을 확인하는 일은 피곤하다. 때로 남성과 여성으로 치환할 수 없는 복합적 조건들이 우리의 싸움을 혼란스럽게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깨달았다. 남편과 나를 가르는 쟁점과 갈등은 개인적 특수성이 있을 지라도 ‘몇몇 사회구조가 사적인 것 속에서 와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은밀한 지표’(59쪽)인 경우가 많고, 나는 이 은밀한 것들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야 한다.


1장을 읽으며 나는 산업사회가 ‘봉건제의 현대적 형태’라는 말에 무릎을 쳤다. 성별 역할이 미리 규정되는 것은 전통의 잔재가 아니라 산업 사회의 토대에 뿌리내리고 있는데, ‘임금 노동자는 가사 노동자를 전제하며 시장을 위한 생산은 핵가족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산업 사회는 남녀의 불평등한 역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노동자는 24시간 회사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고, 회사의 요구에 따른 이동이 가능한 자를 전제로 한다. 자녀를 양육하며 언제든 이사를 따라갈 수 있고 정서적 뒷받침을 해주는 가사 노동자의 존재가 없이는 임금 노동자와 가정이 양립할 수 없다. ‘하나의 노동 시장 일대기와 평생의 가사노동 일대기는 조화시킬 수 있지만 두 개의 노동 시장 일대기는 조화시키기’(31쪽) 매우 어렵기 때문. 이 성별분업은 산업 사회에 생겼다는 점에서 ‘현대적’이고, 태어나면서부터 지위가 부여된다는 점에서 ‘봉건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 봉건적인 '성별 운명'을 완화, 무효화, 악화, 은폐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 뒤에 현실적 불평등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곤 하지만, 불평등은 실재하고, 그것이 바로 사랑을 쌀쌀맞아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혼 9년차. 사랑의 쌀쌀맞은 뒤통수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게 나나 남편 개인의 성향, 성격, 혹은 원가족과 '내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부부만의 일이 아니라, '불평등'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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