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읽기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 지음, 새물결, 1999
‘사랑은 종교 이후의 종교이며, 모든 믿음의 종말 이후의 궁극적 믿음이다.’(41쪽)
낭만적 사랑의 개념은 오래된 것이 아니다.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자리, 전통적 결속이 주는 안전감이 사라진 자리에 사랑이 급부상했다. ‘삶이란 본래가 모순적인 것이며, 자기 삶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그 어떤 전례도 없다는 사실’(82쪽)의 압박감 속에서 지속적이고 가까운 관계의 중요성은 커져간다. 대부분의 공동체가 해체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 관계는 남녀간의 사랑으로 대표되고, 드라마, 팝송, 소설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칭송된다.
남녀간의 사랑에 목메다는 풍조를 어리석다 여기면서도, 나 역시 똑같은 어리석음에 빠졌다. 나와 그의 사랑은 다를 거라 믿었다. 신앙과 신념을 공유하는 동지면서도 취향이 잘 통하는 친구이고,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는 독립된 관계이길 바랐다. 조건 보고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하는 얄팍한 자존심이었다.
결혼을 하고보니 이 남자는 정치적, 사회적 견해가 대부분 나와 달랐다. 내가 엄마 아빠에게 갖고 있는 책임감과 부채의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행을 싫어했다…… 한편으로 우리는 잘맞는 친구였다. 아이가 없는 오랜 기간 동안 우리는 상대가 좋아하는 리액션, 유머 코드, 힘들 때 위로하는 방법을 연마했고, 자질구레한 일들로 시작해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수다를 오래 나누었다.
소강상태에 이르렀던 부부싸움은 아이를 낳고 부활했다. 가끔이라도 싸움을 한 날엔 데미지가 컸다. 전업이라는 고립감,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피해의식, 그동안 남편과의 관계에서 쌓아올린 안정감에 대한 배신의 감정이 혼란스레 뒤섞였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2장은 결혼관계의 어려움을 자유(=자신이 되는 것)와 사랑(=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이에 헌신하는 것) 사이의 딜레마로 설명한다.
개인화 사회에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나 자신이 되라’는 요구에 맞닥뜨린다. '자유'로 보이는 이 요구는 사실 교육을 받고, 직장을 잡으라는 요구다. 오늘날 자아실현은 직업 혹은 시장의 요구와 뗄레야 뗄 수 없기에. 이 요구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관계에 헌신하는 것을 방해하고, 또한 친밀한 관계 때문에 방해받는다.
남편과 나는 불완전한 개인인데다 서로 다른 진영(성)에 속해있고, 오늘날의 바람직한 부부상은 사회의 변화가 만든 역사적 개념일 뿐이다. 부부 관계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정박지일 뿐. 그러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욕구를 부정한 채 너 자신이 되라 몰아댈 수는 없다. '해방되는 일과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일 사이에 균형을 잡는 어려운 작업'은 어떻게 가능할까.
저자는 가족의 편에 서서 시장의 역동성을 후퇴시키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사람들이 함께 다시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방법이란 ‘가족을 개방적으로 만들어 가족 구성원들이 홀로 있기를 꿈꿀 수 있게 하는 것, 이와 동시에 정체성 위기와 결혼의 소용돌이보다 오래 갈 수 있는 우정의 망을 키우는 것’(286쪽)이다.
먼저 가족 구성원들이 홀로 있기를 꿈꿀 수 있게 하는 것. 30평대 아파트, 중형차 등 일정 수준 이상의 자본을 전제하는 표준적 삶의 패턴, 가족주의에 대한 압력을 벗어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은 홀로 있는 시간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엄마 3년차인 올해, 나는 토요일을 나의 시간으로 쓰기 시작했다. 토요일이면 가까운 친정으로 도망가 낮잠을 잔 후, 카페에 간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독립적이면서도 함께 살 수 있는 새로운 형식'(284쪽)을 꿈꾼다.
다음, 우정의 망을 키우는 것. 전업이 된 후 가장 크게 느끼는 문제다. 일터에서 맺어진 관계들은 멀어졌고,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며, 또래를 키우는 엄마들과는 육아 이야기 뿐. 고립감이 커지니 남편에게 의지하게 되고, 남편과의 대립과 갈등이 더 큰 타격으로 다가온다. 함께 책을 읽는 학인들이 소중하고, 서로의 '혼란과 약점의 짐'을 나누어질 수 있는 관계의 안전망이 갈급하다.
"전업 3년차, 제게도 가족을 넘은 더 넓은 관계들이 필요합니다!"
우정은 어려운 순간에 서로를 받쳐 주고 건설적 비판에 자기를 열어둠으로써 재삼 재사 새로워져야 하며, 공동의 생명선처럼 작용하여 서로의 혼란과 약점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한다. 지인 관계는 이보다는 더 느슨한 형식인데, 이런 식으로 서로를 얽는 것은 한계와 의심으로 가득 찬 개인의 일대기에 대해 안전망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바꾸어 말해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적합하고 삶의 비참함과 광기를 피하기 위한 어떤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2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