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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Nov 24. 2022

인도에서 생긴 일(11)

영인, 그리고 주언이란 남자

 지프는 사람들을 싣고 사막으로 향했다. 지프에 탄 여행객은 모두 6명, 그 뒤로 한 대의 지프가 더 오고 있다. 총 12명의 인원이 한 팀이 되어 사막 투어를 떠난다. 낙타몰이꾼은 총 네 명. 모두 인도 현지인이다. 12명의 여행객은 모두 한국인이고 여자는 나까지 6명이다. 그중에는 기차에서 만났던 여자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6명의 남자 중에는 주언이란 이름의 남자도 있다. 우리는 지독히 우연히도 함께 사막으로 떠나게 됐다.



 오후 6시, J호텔 앞에 빨간 모자를 쓴 남자가 서성이고 있다. 로비 창문 틈으로 내려다보다  내게 쪽지를 준 남자라는 확신이 들어 얼른 남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쪽지...”

 “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못 만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나오셨네요.”


 쪽지를 준 남자는 쪽지 속 이미지보다 더 친절하고 따뜻하게 날 맞아주었다. 일행들은 근처 레스토랑으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며 내게도 같이 가겠느냐 물었다. 물론 제안이 고마웠지만 당장 내일 사막 투어를 떠나려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기에 시장에 가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내일 함께 출발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져서 혼자 다니기는 위험한데. 저랑 같이 가시죠. 가져올 거 있으면 호텔 가서 가지고 나오세요. 저는 일행들한테 말하고 올게요. 여기서 10분 뒤에 만나요. 혼자 가지 말고요. 아셨죠? 금방 올게요!”


 쪽지를 준 남자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다급하게 뒤돌아 뛰어갔다. 조금 과한 친절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 같은 사막 투어 멤버로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따로 챙겨 나올 것은 없어서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쪽지를 준 남자를 기다렸다. 잠시 후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가시죠.”


 쪽지를 준 남자의 이름은 영인, 나이는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 나보다 오빠가 아닐까. 인도 여행을 한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기에 몰골이 엉망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빠처럼 보이는 것일까. 오빠인지 동생인지 친구인지 모를 영인이란 남자의 도움으로 사막 투어에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둘씩 준비했다.


 먼저 터번으로 두를 기다란 천을 구입했다. 사막 투어 좀 해봤다 거들먹거리려면 터번을 두르고 낙타 위에 앉아 있는 사진 한 장쯤은 있어야 한다고. 자신은 최대한 현지인 느낌을 내고 싶어서 흰색 천을 샀다며 그래서 면도도 하지 않았다고 턱을 어루만지며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내게 주황색 천을 건넸다.


 “이게 잘 어울리는데? 이걸로 하시죠.”


 영인이란 남자는 특이한 말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하시죠, 가시죠, 보시죠, 그러시죠 등등 권유형 명령어라고 해야 할까, 명령형 청유어라고 해야 하나. 친절과 단호박의 애매한 경계를 넘나드는 말투였다. 처음 보는 유형의 말투여서 호기심이 생겼다. 친절한데, 단호해. 결단력 있는데 다정하잖아. 심신이 지친 상태였기에 이것저것 알아서 결정하고 챙겨주는 것이 고맙게만 느껴졌다.


 럼주도 한 병 구입했다. 별똥별 떨어지는 밤, 양고기 바비큐를 먹으며 럼주 한 잔은 필수라고 했다. 자신의 일행들이 종류별로 술을 구비했으니 나는 럼주만 준비하면 된다고. 잔불에 구워 먹을 고구마도 잔뜩 샀으니 걱정하지 말라는데, 설마 내 이미지가 먹방 BJ나 술고래로 비친 건 아니겠지.


 “근데 저보다 누나이실 거 같은데.”


 영인이란 남자가 입을 함부로 놀린다. 누나라니. 누가 봐도 내가 다섯 살쯤 어려 보이는 것 같은데. 나는 억울한 마음에 침까지 튀겨가며 내 나이를 밝혔다.


 “맞네요, 누나. 저보다 한 살 누나네요. 저는 두세 살 정도 누나일 줄 알았는데, 한 살 차이면 친구네. 왜냐면 내가 빠른 생일이거든. 반갑다.”


 영인의 말 놓는 솜씨를 보니 카사노바 혹은 난봉꾼이 분명했다. 순간 2박 3일 긴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지에서 정신 안 차리면 가짜 설렘에 속을 수도 있다. 주언이란 남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행인 것은 영인은 잘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잘생기기라도 했다면 터번 대신 웨딩드레스 고르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인과 즐거운 쇼핑을 마치고 호텔 방으로 들어왔다. 영인의 일행과 인사라도 나눌까 해서 레스토랑에 함께 가봤지만 이미 다 먹고 돌아갔는지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음날 아침에 만나서 짜이 한잔씩 하며 통성명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영인은 자신의 일행도 전부 인도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이니 어색하지 않게 금세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키며 숙소로 돌아갔다. 착한 녀석이다. 영인의 오지랖에 피식 웃으며 내일 사막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다음날 아침 영인과 약속한 대로 P호텔 루프탑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영인이다.


 “왔어? 이쪽으로 오시죠.”


 영인의 말소리에 일행 하나가 나를 향해 몸을 틀어 앉았다. 낯이 익은 얼굴이다. 이게 누구야. 한인식당 매니저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주언이란 이름의 남자가 나를 보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머지 두 명은 식당에서 얼핏 봤던 여자들이었다. 모두 나를 향해 짧은 목례로 인사를 건네준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영인이 덕분에 합류하게 됐어요.”


 주언이란 이름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건넸다. 나도 머쓱하게 웃으며 영인의 옆에 앉아 짜이를 홀짝였다.


 “그 식당에서 뵙지 않았나? 김치찌개 시키셨는데 재료가 다 떨어져 가지고...”


 매니저는 날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이미 친해진 여행자들끼리 회식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고 한다. 만장일치로 김치찌개를 메뉴로 정해서 다들 김치찌개에 소주 한 잔씩을 걸쳤는데, 주언이란 이름의 남자가 오지 않아 그 몫만 남겨뒀던 것이라고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다고 뒤늦은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꺼내놨다.


 “아니에요. 기분이 나쁘긴요. 그래도 생각해서 조금 덜어주셨잖아요. 늦었지만 잘 먹었습니다.”

 “근데, 식당일 잠깐 도와주는 친구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혹시 저 찾으셨어요?”


 한인식당 여직원이 내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별일 아니라고 대충 둘러대며 다시 짜이를 홀짝거렸다.


 “아니, 그냥 여행정보를 제일 많이 아실 것 같아서요. 제가 인도 여행이 처음이라 일행도 없고 도움받을 곳이 없어서 그냥 식당 간 김에 여쭤본 거예요.”


 매니저는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영인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곁눈질로 주언이란 이름의 남자를 쳐다봤다. 순간 남자의 고개가 갸우뚱 움직였다. 설마 눈치챈 것일까. 내가 자신을 따라 20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이곳에 왔다는 것을 짐작해낸 것일까. 갑자기 그 자리가 불편해졌다. 정말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주언이란 남자는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단지 단 며칠, 몇 시간 동행했던 것뿐인데. 그것도 타지 배낭여행자들에게 아주 흔한 일일 뿐인데. 내 존재가 부담스럽거나 불편하진 않을까.


 잠시 후, 우리를 태워다 줄 지프가 도착했다. 우리는 P호텔 앞에서 또 다른 일행들을 기다렸다. P호텔 맞은편 K호텔에서 6명의 한국인들이 우르르 나왔다. 우리와 같이 떠날 일행들이다.


 “어머, 여기서 또 만날 줄 알았어! 반가워요. 여기 내가 말한 내 남자 친구! 자기야 인사해. 내가 말했지. 기차에서 나 열받아있는데 나한테 말 걸어준 여자분. 내가 여기 호텔 추천했잖아. 어머, 그러고 보니 내가 추천해놓고 난 거길 못 갔네. 미안해요. 하하하. 에이 뭐 이렇게 만났으면 됐지. 그죠? 같이 가니까 너무 좋다.”


 기차에서 만난 여자였다. 여자는 여전했다. 인도 여행을 하느라 성격이 괄괄해진 것이 아니라 원래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쨌든 반가웠다. 막 전역했다던 남자 친구도 짧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인사를 건넸다. 나머지 4명의 한국인도 남녀, 남녀끼리 서있는 것으로 보아 연인 사이 인듯했다.


 “여기는 내 친구들. 이렇게 커플, 요렇게 커플. 내 친구들이기도 한데, 원래는 내 남자 친구 친구들이에요. 커플끼리 만나다 보니 친해져서 인도 여행도 같이 오게 됐어요.”


 여자의 TMI 덕분에 우리는 금세 한 팀으로 섞일 수 있었다. 마치 오래도록 같이 여행을 한 사이처럼 자연스레 인도에서의 일상을 나누며 곧 시작될 사막 투어에 대한 설렘을 공유했다. 잠시 후 낙타몰이꾼들이 도착했다. 그들의 안내에 따라 큰일이라도 일어난냥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지프에 올라탔다. 자연스레 기차에서 만난 여자들 일행과 영인과 나, 매니저, 한인식당 여자 손님 둘, 그리고 주언이란 남자로 일행이 나뉘었다.


 “내가 가운데 자리 앉을게. 젤 불편한 자리니까. 누나들은 맨 뒤로 앉고, 매니저 형은 젤 연장 자니까 맨 앞에 앉아요. 너랑 나랑 주언이가 젤 젊은 피니까 가운데 앉자고. 레이시 퍼스트, 너 먼저 들어가.”


 영인이 각자 지프에 앉을 위치를 읊었다. 우리 일행은 영인의 말에 따라 각자의 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 역시 영인의 말대로 자연스레 창가 쪽에 앉았다. 그리하여 내 옆으로는 영인, 그 옆엔 주언이란 남자가 앉게 됐다. 나와 주언이란 남자는 영인을 사이에 두고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사막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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