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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Nov 22. 2022

인도에서 생긴 일(10)

자이살메르에서의 하루

 자이살메르의 첫인상은 마치 서부영화 세트장 같았다. 흑백영화에서 컬러로 막 바뀌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 즈음의 컬러필름 필터를 씌운 느낌이다. 선명하진 않지만 옛 색채가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이런 이미지로 기억되는 이유는 건물들 대부분이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 무렵 석양이 드리워진 마을은 황금빛으로 변한다고 하여 골든 시티라 부른다.


 상점과 호텔들이 모여 있는 시내까지는 오토릭샤를 타야 했다. 이제 흥정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능숙하게 깜까로를 외치며 적당한 가격에 타협해 시내에 들어섰다. 무모하게도 아직 숙소를 정하지 못했기에 숙소를 찾는 게 먼저였다. 다행히 기차에서 만난 여자가 알려준 곳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기간이 맞으면 우연히라도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며 꼭 그곳에 묵으라고 일러줬다. 그곳은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는 인도 여행 고수의 추천 숙소라는 말도 덧붙였다.


 자이살메르에는 자이살메르 성이 있다. 숙소는 성 밖과 성 안쪽으로 나뉜다. 여자가 알려준 숙소는 성 안에 위치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열쇠를 건네받고 방으로 들어왔다. 일단 씻고 싶었다. 들어오자마자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했다. 핫 샤워가 된다고 엄청 강조했던 곳인데 정말 순간온수기가 있었다. 감격스러웠다. 델리에서 숙소는 핫 샤워가 된다고 해놓고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고 하니 미지근한 물이 들어있는 양동이 두 통을 양손에 덜렁덜렁 들고 와서 욕실에 놔준 게 다였다. 그러니 감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도 여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별것 아닌 것에 행복을 찾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이제 알아봐야 할 것이 많다. 자이살메르에 온 목적은 주언이란 남자를 만나기 위한 것이지만 스토커처럼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남자를 찾아 헤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게 된 계기는 그 남자가 맞지만 일단 도착하고 나니 이곳에서의 여행을 즐기는 것 또한 배낭여행자의 임무였기에 다음 계획을 세워야 했다.


 자이살메르를 찾는 여행자들의 목적은 십중팔구 사막 투어이다. 낙타를 타고 사막에서 먹고 자는 일정이다. 당일 체험도 있다고 하지만 언제 사막에서 자보겠는가. 1박 2일과 2박 3일 일정 중 고민하다가 2박 3일 일정을 택했다. 더 길게는 보름간 사막을 떠돌아다니는 코스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사막에 오래 머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또 모른다. 2박 3일 동안 사막의 매력에 빠져버린다면 언젠가 14박 15일 사막투어를 위해 인도행 비행기 티켓을 다시 끊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도의 매력은 뜬금없이 툭툭 튀어나오기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인도에서 살림을 차릴 수도 있다.


 사막 투어는 잘 알려진 대표 업체가 여럿 있다. 대부분의 여행자가 대표 업체를 통해 사막 투어를 한다. 특히 일행이 없는 경우, 여자 혼자인 경우는 안전상의 문제로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업체를 고른다. 나 역시 여자 혼자에 일행도 없었기에 한국 사람들이 많은 곳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저녁이 다된 지금 따로 발품 팔아 알아볼 여건은 안됐다. 한국사람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터라 인터넷방으로 가서 인도 카페에 글을 하나 올렸다.


사막 투어 예정입니다. 자이살메르 J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동행하실 분 혹시 계실까요? 아님 업체를 추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자고 일행 없이 혼자 왔습니다. 댓글이나 쪽지 부탁드려요.


 글을 올린 뒤 이것저것 웹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인도에서 오래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심을 따로 구매해서 현지 휴대폰을 개통하지만 나는 그런 준비 없이 왔기에 뭔가를 검색하거나 연락을 해야 할 때면 오늘처럼 인터넷방을 찾아다녀야 한다. 연락되는 휴대폰 없이 혼자 여행을 하는 게 조금은 무모한 일이긴 하지만 이런 아날로그 감성을 언제 느껴보겠는가. 매일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한국에서의 일상이 가끔은 시간을 막 쓰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곳에서는 휴대폰을 들여다볼 일이 없으니 매 순간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집중할 수 있어 좋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그 사이 SNS로 엄마에게 연락도 해두었고 친구들에게 안부도 전했다. 카페에 올린 글에는 댓글이 달렸을까. 내가 쓴 글을 다시 새로고침 했다. 이번에도 역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을 때쯤 페이지가 연결됐다.


 댓글 0개. 놀라울 만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조회수도 처참했다. 그래. 딱 삼십 분만 더 기다려보자. 그때도 댓글이 0개면 내일 아침에 다시 확인하면 되니까. 30분 동안 몇 번의 새로고침을 했는지 모른다. 내일 확인하면 될 일인데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답답한 마음에 새로고침 버튼을 연속으로 다다닥 눌러버렸다. 이놈의 느려 터진 인터넷, 내 속도 같이 터지기 전에 마우스가 터질 듯 클릭 버튼을 눌렀다.


 댓글 1


 나의 간절함이 만들어낸 착각은 아니겠지. 댓글 옆에 1이란 숫자를 확인하자마자 다시 화면이 하얗게 바뀌었다. 새로고침을 여러 번 누른탓이다. 다시 화면이 뜰 때까지 떨리는 마음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댓글 1.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내 글에 댓글이 달렸다. 마우스 휠을 천천히 내려본다. 두근두근. 어떤 댓글일까.


 쪽지 확인 부탁드려요.


 이런 씨. 관심과 댓글이 감사하긴 하지만 다시 메인으로 돌아가 쪽지 버튼을 누르고 쪽지를 확인하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살짝 나올 뻔했다. 그래도 괜찮다. 쪽지라면 단순 응원의 말은 아닐 테지. 뭔가 내게 필요한 정보가 가득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힘내자. 나는 의지의 한국인이다.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애국가를 읊조려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은 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이 없어질 때쯤 드디어 쪽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도 자이살메르에 있어요. 제 숙소는 성 밖에 있습니다. 저는 내일모레 사막 투어 예정입니다. 알아둔 곳이 있는데 괜찮으면 동행하실래요? 여자 혼자면 매우 위험할 거예요. 저는 남자고 동행이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6명이고 남자 여자 골고루 섞여있으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괜찮으시면 내일 J호텔 앞에서 잠깐 얘기 나눠요. 다만 제가 낼 일행들이랑 일정이 있으니 오후 6시 그 앞에서 기다릴게요. 삼십 분 정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혹시 인터넷 사정 때문에 답장을 못하실 수도 있으니 답장 안 하셔도 오후 6시에 호텔 앞에서 기다려볼게요. 빨간색 모자 쓰고 가겠습니다.


 천사가 분명했다. 글에 내 사정을 구구절절 적지 않았음에도 내가 필요한 정보, 듣고 싶었던 말만 콕 집어 해주시다니. 갑자기 신이 났다. 나도 사막 투어를 할 수 있게 됐다. 그것도 안전하게, 한국인들과 동행할 수 있다니. 인도가 신의 나라이긴 한가보다. 이건 필시 신의 가호가 아니고서야 일어나기 힘든 일 아닐까. 인도 신의 가오는 대단했다. 간지 짱짱맨! 그렇다. 나는 지금 매우 들떠있는 상태다. 미친 인터넷이 계속 끊기는 바람에 쪽지에 답장은 하지 못했지만, 답장을 안 해도 기다린다는 쪽지 속 남자의 말을 곱씹으며 기분 좋게 호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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