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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Nov 21. 2022

인도에서 생긴 일(9)

기차에서 생긴 일

 5시 45분에 출발 예정이었던 기차는 두 시간을 훌쩍 넘겨 8시 10분이 조금 지나서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동냥으로 알아낸 정보로는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출발시간이라고 한다. 7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다는 말에 모르는 사람임에도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존경의 엄지 척을 날려드렸다. 


 내가 예약한 기차는 SL등급이었다. 인도는 기차에도 객차 등급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특실의 개념이 있긴 하다. 인도는 그보다 더 디테일한 등급으로 나뉜다. 1A 등급은 이름에서도 단번에 알 수 있듯이 최상급 객차다. 객실은 칸막이로 나뉘어 있고, 한 객실당 두 개의 침대가 있다. 나도 타보진 않아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후기들을 보면 드라마틱한 VIP룸을 생각하면 매우 실망할 것이라 말한다. 몇 명이 함께 쓰냐의 차이만 있을 뿐 2A, 3A등급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타고 있는 SL등급은 슬리퍼를 의미한다. 배낭여행자들이 젤 많이 이용하는 등급이다. 다른 등급에 비해 저렴하면서도 나름 버틸만하다.


 다만 주의할 점은 짐을 단단히 고정해야 한다. 이건 어느 등급이나 마찬가지일 듯한데, 자물쇠로 트렁크를 칭칭 감아서 기둥에 묶어두지 않으면 어느새 사라져 버리니 주의해야 한다. 나도 기차에 오르자마자 기둥에 배낭부터 동여맸다. 그리고 청결도 기대하면 안 된다. 화장실 칸이 있는데 변기 밑이 뚫려있어서 내가 배출하는 내용물은 고스란히 기찻길로 떨어진다. 친환경적인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인도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이제 19시간 30분 뒷면 자이살메르에 닿을 수 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웠다. 총 6개의 침대가 있는 칸이지만 활동하는 낮 시간에는 중간에 있는 두 개의 침대를 집어넣고 마주 앉아 가는 형태다. 이제 밤이 됐으니 칸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누워서 쉬어야 하기에 중간 침대를 펼치고 각자 자리로 올라갔다. 내 자리는 다행히 맨 위칸이었다. 오르내리는 게 불편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부딪힐 일은 없어서 편했다. 


 침낭을 꺼내서 잠자리를 깔고 그 안에 들어가 수첩을 펼쳤다.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짧게 소회를 적어본다. 오늘 썼던 돈도 정리했다. 기차표값을 제외하고 오늘 하루 쓴 돈은 우리나라 돈으로 5천 원도 채 되지 않았다. 새삼 인도의 싼 물가에 감탄하며 아직 불룩한 복대를 어루만져본다. 마음이 평온해진다. 역시 마음의 여유는 두둑한 지갑에서 비롯된다. 


 까만 밤을 보내고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멀리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목소리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한국말로 뭐라 뭐라 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궁금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마음에 침대칸에서 뛰어내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나섰다.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는 통에 가까이 갈 수는 없었지만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나라 배낭여행객이 자고 있는데 인도 사람이 가방을 뒤적인듯했다. 다행히 물건이 없어지기 전에 잠에서 깼고,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육두문자를 날린 것이다. 


 잠시 후 상황은 일단락됐고, 구경하던 인파도 흩어졌다. 화를 내던 한국인 배낭여행객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씩씩거리고 있었다. 일행은 없어 보였다. 뭐라도 도움이 되진 않을까 해서 조심스레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괜찮으세요...?”

 “네? 아, 한국분이시네요. 아니, 가방을 막 뒤지더라니까요. 진짜 뒤지고 싶나. 아 열받네.”


 여자는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했다. 가방을 뒤적이길래 제지를 했음에도 노 프라블럼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대답이 돌아왔다며 계속 육두문자를 남발했다. 벌써 여러 번 느끼지만 인도 사람들은 친절과는 별개로 뻔뻔한 경우가 많았다. 여자의 얘기를 들으며 또 한 번 느꼈다. 인도 사람들의 뻔뻔함과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지갑이 두둑하지 않음에도 저리 여유로울 수 있다는 게 한편으론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디까지 가세요? 일행은 없어요?”


 이제야 진정됐는지 내게 질문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조금은 수다스럽고 괄괄한 성격을 가진 여자다. 아니다. 인도 여행을 하면서 변했을지도 모른다. 여자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곳이 인도이기도 하니까. 


 “저는 자이살메르로 가요. 일행은 없고, 그냥 혼자 돌아다니다가 지금처럼 한국분 만나면 같이 다니고 그러고 있어요.”


 여자는 나보다 먼저 내린다고 했다. 군대에서 막 전역한 남자 친구와 인도 배낭여행을 하며 재회하기로 했다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저도 남자 친구랑 만나서 자이살메르로 갈 거예요. 또 만날 수도 있겠네요.”


 여자는 인도에 온 지 벌써 한 달이나 되었단다. 남자 친구는 일주일 전에 전역했고 며칠 전 인도에 도착했으며 서로 있는 위치의 중간지점으로 이동해서 만나기로 했다고 몇 년 지기 친구처럼 자신의 정보를 대방출했다. 부러웠다. 낭만적인 재회 방법이었다.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군인 남자 친구도 없고 고무신 신을 생각도 없었기에 금세 포기했다. 


 여자가 내리기 전까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막상 여자의 목적지에 도착하니 그새 정이 들었는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은 이토록 애틋하다. 여자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낮 시간이었기에 중간 침대를 정리하고 모두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각자 책을 읽거나 일행끼리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있던 칸은 남자 외국인 배낭여행자 2명과 남자 인도 사람 1명, 여자 외국인 배낭여행자 1명, 그리고 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칸은 비어있었다. 예약할 때는 분명 만석이었는데 누군가 기차를 놓치거나 어떤 사정에 의해 타지 못한 듯했다. 


 서로 다들 국적이 다르고 나를 비롯해 영어에 취약한 여행객도 있어서 긴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칸에 탄 인도 배낭여행자라는 공통점 때문에 서로 호의적이었다. 짧은 영어와 손짓 발짓을 동원해 각자 경험담과 정보를 나누고 주전부리도 나눠 먹었다. 이제야 진짜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더디면서도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자이살메르에 도착한다. 애초의 목적은 주언이란 이름의 남자를 찾아 나서기 위한 여정이었지만 이제는 못 만나도 괜찮을 것 같다. 정말 못 만난다면 조금, 아니 많이 아쉽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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