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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Nov 18. 2022

인도에서 생긴 일(8)

자이살메르행 기차

 자이살메르행 기차를 타야 한다. 원래 여행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델리에서 자이살메르까지는 기차로 20시간. 이번 기차를 놓치면 다음날이나 떠날 수 있다. 그럼 남자와 엇갈릴지도 모른다. 요동치는 심박수만큼이나 빠르게 기차역을 향해 뛰었다.


 어제 남자가 떠난 후, 저녁에 한인식당을 찾았다. 밥을 먹으러 가기도 했지만 남자의 행방이 궁금한 것이 더 컸다. 분명 매니저랑 친한 사이 같으니 어디로 가는지 알 것이라 생각했다. 식당에 들어서서 김치찌개를 주문하고 앉았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매니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여직원이 와서 뭘 찾느냐 물었고 매니저님이 어디 계시는지 찾고 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매니저님은 휴가차 여행을 떠났단다.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여직원이 김치찌개를 서빙해주며 말을 덧붙였다.


 “얼마 전에 여행 와서 친해진 동생이랑 사막에 간다고 하셨거든요. 아마 일주일 후에나 도착하실 거 같은데, 급한 일이면 매니저님 휴대폰 번호 알려드릴까요?”


 그 순간 남자가 떠올랐다. 매니저랑 여행을 간 얼마 전 여행 와서 친해진 동생이 주언이라는 남자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 남자가 맞는지 정확히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그냥 내 느낌을 믿고 싶었다. 사막이라. 남자와 찬드니 촉을 거닐며 했던 얘기를 기억해냈다. 인도에는 많은 사막이 있는데 그중 자이살메르라는 곳이 가장 좋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밥을 대충 욱여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매니저님 번호 알려드려요?”

 “아니요. 괜찮아요. 잘 먹었습니다.”


 그 길로 남자를 처음 만났던 컴퓨터방으로 향했다. 당장 기차표를 알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느려 터진 컴퓨터를 붙들고 자이살메르로 가는 기차표를 알아봤다. 검색 클릭 후 도를 닦는 심정으로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을 때쯤 마침내 델리발 자이살메르행 기차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자이살메르로 가는 기차는 하루에 한 번, 오후 5시 45분에 출발한다. 이미 남자가 떠난 뒤였다. 그래서 다음날인 오늘에서야 기차를 타러 델리 역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사실 출발 전까지만 해도 많은 고민을 했다. 매니저와 사막으로 떠나는 친한 동생이란 사람이 주언이란 이름의 남자가 아닐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아니, 아예 내가 잘못 짚은 것일지도 모른다. 괜히 따라나섰다가 여행 계획에도 없던 낯선 도시에 덩그러니 혼자 헤맬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맞다고 한들 그들의 목적지가 자이살메르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왜 내가 그 남자의 행방을 찾아 이렇게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단 두 번 하루에 몇 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을 동행한 것뿐인데. 그냥 원래 가려고 했던 아그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그라에 가서 타지마할을 보고 나면 그 남자 생각도 싹 잊힐 것이다. 그래 아그라로 가자. 애초에 인도여행을 떠나온 목적은 타지마할이었잖아.


 그러나 막상 자이살메르행 기차 시간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배낭에 짐을 쑤셔 넣고 델리 역을 향해 뛰고 있던 것이다. 남자와 반띵 하고 남은 바나나도 야무지게 챙겼다. 델리 역에 도착하면 먹을 생각으로 바나나를 손에 꼭 쥐고 달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 내 바나나를 낚아채갔다. 바나나를 뺏어가며 손등도 할퀴었나 보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손등이 벌겋게 부풀어 올라있었다. 대체 누가 바나나를 뺏어간 거야. 길거리에 즐비한 노숙자일까. 바람이 스쳐 지나간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보니 그곳엔 사람이 아닌 원숭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바나나를 쥔 채로 말이다. 이제 하다 하다 원숭이까지 날 우습게 보다니. 순간 화가 났지만 바나나를 든 원숭이 등 뒤로 새끼 원숭이가 얼굴을 빼꼼 내미는 것을 보고 저절로 분노조절이 돼 버렸다. 한 손에는 바나나를 한 손에는 새끼를 껴안은 원숭이의 눈빛은 섬뜩하기보단 애처로웠다. 남자와 함께 산 바나나라 조금 아쉬운마음도 들었지만 바나나를 움켜쥐고 있는 원숭이의 눈빛을 보곤 쿨하게 바나나를 포기했다. 그리고 원숭이 모녀(혹은 모자일지도)에게 눈인사를 건넨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여곡절 끝에 델리 역에 도착했다. 이제 기차만 타면 된다. 델리 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 35분. 10분 후면 기차가 올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바나나 대신 가방에 있던 초콜릿을 하나 꺼내 먹었다. 그리고 마음먹었다. 자이살메르에 가서 그 남자를 만나지 못해도 실망하지 말고 이 여행 자체를 즐기기로. 사막은 계획에 없었지만 멋진 여정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같은 곳이기에 기차 시간이 다가올수록 설렘은 더 커져갔다.


 이제 5시 45분이다. 곧 기차가 도착하겠지. 인도의 시간 개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출발할 수 있겠다. 그렇게 시간 위에 몸을 맡기고 시계 초침에 매달려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6시 45분이 되어도 기차는 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나 지났다. 설마 내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출발한 것일까. 그 남자의 행방과는 상관없이 자이살메르에 가고 싶어 졌는데 일이 틀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한없이 우울해졌다. 계획에도 없던 여정이라 역시 안 되는 것일까. 아님 원래 인도 여행의 목적이었던 샤 자한의 타지마할을 배신했기 때문인가. 이쯤에서 포기하고 내일 아그라행 기차를 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체념섞인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차 연착 관계로 한 시간 후에 자이살메르행 기차가 도착한다는 것이다. 신의 나라답게 나의 간절함이 통했나 보다. 이제 한 시간 후면 자이살메르로 갈 수 있다. 드넓은 사막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별똥별을 볼 생각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플랫폼 뒤로 끝도 없이 이어진 기찻길을 바라봤다. 그 길을 따라 이미 내 마음은 자이살메르에 닿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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