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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 Nov 18. 2022

인도에서 생긴 일(7)

남자가 떠났다.

 한국을 떠나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이제 배낭여행자의 일상이 익숙해질 시점이자 엄마가 보고 싶어질 시기다. 친구들도 그리웠다. 그보다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었다. 아니다. 지금 가장 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은 바로 물갈이다. 컨디션도 좋지 않고 환경도 낯설다 보니 위아래로 쏟아낼 수밖에. 그래도 배는 고팠기에 물갈이 증상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먹어댔다. 


 어제 남자와 찬드니 촉을 걷다가 사온 바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호텔 앞에서 반띵 하고 각자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뻗은 뒤 새벽부터 물갈이 증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일단 바나나를 먹어보기로 한다. 당장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다. 우적우적 바나나를 밀어 넣자마자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괴롭다. 오늘 여행은 물 건너간 것인가. 


 약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향했다. 아직 속이 부글부글 끓고 불안정했지만 하루 종일 호텔 방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벌써 시간은 점심을 훌쩍 넘겨 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멀리 가긴 불안하니까 빠하르간지 골목골목을 구경하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빠하르간지는 인도 배낭여행객들에게 진한 추억으로 남는 장소다. 여행의 시작점이자 마무리 지점이 되기도 한다. 가장 많은 친구를 사귀는 곳도 여기다. 그 때문인지 인도 여행 내내 가장 그리워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장소다. 물론 이곳의 첫인상은 실망과 경악 그 자체였다.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복잡하고 세상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을 반나절이면 다 경험할 수 있기에 처음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다. 하지만 정을 붙이면 이보다 더 안락하고 애정 가는 곳도 없다. 


 여유롭게 짜이 한잔을 마시고 길거리 미용사가 머리 깎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예쁜 누나라고 붙잡는 호객꾼들과 잠시 실랑이도 벌였다. 첫날 울면서 뛰어 들어갔던 전화방 앞도 슬쩍 들여다봤다. 날 위로해주던 ‘알람’은 여전히 낯선 여행객들을 향해 따뜻한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잠시 눈이 마주쳐 어색하게 웃어 보이니 반갑게 손을 흔들어준다. 날 기억하려나. 이들 눈엔 다 똑같이 생긴 동양 여자처럼 보일 텐데. 뭐, 알고 반겨주는지 모르고 인사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고마웠다. 크게 될 녀석이다. 저런 서비스 마인드면 훗날 백종원 아저씨보다 더 큰손이 될듯하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거리를 바라보니 더없이 즐거웠다. 그 틈에 잠깐 주언이란 이름의 남자도 떠올랐다. 빠하르간지를 떠난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어디로 간단 이야기는 없었는데. 하긴, 자기 계획을 나한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큰일이다. 배가 또 꾸륵거린다. 빨리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전속력으로 걸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여기서 실수하면 안 돼. 인도에서 똥쟁이로 소문날 순 없어. 애써 최대한 딴생각을 하며 심호흡을 한 끝에 큰 실수 없이 호텔 앞에 다다랐다. 


 “어? 오늘도 계셨네요. 저는 이제 이동하려고요.”


 주언이란 이름의 남자였다. 하필 이런 때 마주치다니. 길게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빨리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세요? 즐거운 여행 하세요. 그럼 전 이만.”


 뒤도 돌아볼 새 없이 방으로 내달렸다. 뒤에서 주저하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뒤를 돌아보면 돌로 변해버리는 저주에 걸린 여자처럼 눈을 질끈 감고 앞만 보며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뱃속에 있던 비둘기 오천만 마리가 자유를 찾아 푸드덕거리며 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야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해졌다. 남자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래도 나름 이틀 동안 여행 메이트였는데, 아쉬운 작별인사도 없이 보내버리다니. 싹수없는 여자라 기억할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남자는 떠난 뒤였고, 나는 그 남자의 연락처도 몰랐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기에 뒤따라 갈 수도 없었다. 안다고 해도 뒤따라갈 마음도 없지만. 아니다. 어디로 가는지만 안다면 뒤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혼자 여행은 무서울뿐더러 사과도 할 겸 또다시 마주친다면 좋겠다. 아마 호텔 매니저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한인식당에 가서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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