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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디이 Oct 17. 2023

워라밸, 회식 없는 삶이 가져다준 저녁 있는 삶

미국 직장에서의 회식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다

    미국에서의 소통방식, 업무 환경과 사내문화는 한국에서 경험한 것과 많이 달랐다. 나는 그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였고, 현재의 워라밸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직장 업무로 참여한 컨프런스


재택근무가 현 직장에 만족하는 이유라면, 한국과 다른 직장문화는 미국에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하는 이유이다.



    일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하고 반드시 자신의 몫을 해내야 하는 직장 생활임에는 한국과 다른 점이 없다. 다만, 소통의 주제와 방식에 있어서는 크게 차이가 있다. 업무 관련해서는 항상 공식적인 소통 루트인 이메일을 사용하고, 소송의 나라 미국 답게 직장 차원에서는 개인사와 관련된 부당한 언사나 관여를 피하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이다. 급한 일은 부득이하게 문자, 전화를 활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록을 위해서라도 메일을 사용하며 상사의 핸드폰 번호는 알아도 직원의 번호는 모르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내가 주중에 열심히 하더라도 프로젝트가 몰려 있는 경우 데드라인 때문에 아주 간혹 주말에 일을 할 때도 있지만, 평소 내 업무 환경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매일 저녁이 있는 일상을 보내다 보니 이 정도는 감수할만하다.






업무 외의 개인 시간이 보장되어 있고, 단체 생활보다도 나의 선택이 우선시 되는 미국의 직장 생활 문화는 오롯한 통제감을 실감할 수 있는 귀한 경험이다.



    일 년 혹은 분기별로 쓸 수 있는 휴가 (Vacation)과 개인 용무 (Personal day), 병가 (Sick leave) 등에 대해서도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딱히 이유를 적지 않고 본인의 업무 시간 기록지에 간단하게 작성하여 상사의 결재를 받으면 된다. 이 결재도 단지 사용 가능한 기간을 초과하지 않았는지 카테고리 별로 확인하는 정도이지, 개인이 정한 휴가나 병가에 대하여 이유 없이 반려하는 경우 바로 소송감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진짜 소송을 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급한 프로젝트나 업무 기간을 피하고 미리 상사와 논의하는 것은 상도덕이고 회사에서의 일 진행 속도를 참고하여 정하기도 하지만, 공적이지 않은 사적 스케줄은 당사자 본인이 알아서 할 수 있는 권리라는 전제가 짙게 깔려있다.


병가를 낼 때에도 개인 사생활을 중시하는 미국 답게, 병가의 사유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개인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에 대한 것은 개인의 사적 정보이며, 이를 남들이 알게 되는 경우 그에 따른 차별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가의 이유를 공식적으로 증명할 때 사용하는 수 있는 의사 확인서 (Doctor's note)에도 병명을 적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The above named patient had a appointment today for an acute illness."라고만 적혀 있는데, 상기의 환자는 어떤 급성 질환 때문에 의사를 만났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회사에서 질병명을 요구하는 경우도 아마 없을 것이다. 본인이 떳떳하기 위해 병명이 적힌 진단서를 제출하는 경우에도 이를 받은 행정 혹은 인사과 직원 혹은 담당자가 이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은 불법이다. 뒤에서 누군가에게 슬쩍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사실은 직장 내에서 본인의 허가가 있지 않은 이상 해당자의 의료 관련 정보를 누출하거나 이에 대해 대화하는 것은 금지하는 항목이다. 올해 초 코비드가 걸렸을 때, 병가를 3일 이상 쓰는 경우 병원 확인서를 제출해야 하는 사내 규칙상 진단서를 함께 제출하였다. 이때 업무상의 목적을 위해 행정이나 인사과 직원에게 이 내용을 공유해도 된다는 언급을 따로 하였었다.




감탄이 절로 나는 스카이라인을 구성한 빌딩들 안에서는 누군가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직장에서 행정 혹은 인사과의 힘은 매우 막강하다. 상사보다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사과에 찍히는 걸 조심하라는 말도 있다.


    철저히 회사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행정 파트 (Administration)와 인사과 (Human Resources)의 아주 교묘한 (subtle) 관리는 존재한다. 지난겨울 엄마가 오랜만에 미국을 방문하여 나와 함께 지낼 때였다. 입사하고 거의 2년 만에 처음 쓴 긴 휴가였다. 미리 상사와 공유했던 스케줄대로 2주에 걸쳐 휴가를 냈고, 워싱턴을 다녀오는 것 말고는 대부분 뉴욕을 여행하는 일정이라 집을 비울 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딱히 일정 없을 땐 휴가를 내지 않고 일하는 날이 중간중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직원들 타임시트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행정과 직원이 내가 휴가를 내지 않은 날 진짜 일을 했냐고 묻는 이메일이 왔었다고 들었다. 다행히 나는 그날 직속 상사와 줌으로 4시간에 걸친 미팅을 했고, 일을 한 기록이 있었다. 그런데도 의심받은 상황 자체가 매우 찝찝하게 느껴져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 내막을 알아보았다. 알고 보니 우리 팀에서 이전에 일했던 직원이 본인에게 해당된 휴가보다 일주일이나 더 먼저 몰래 휴가를 갔다 온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었다고 했다. 그래서 행정과에서 우리 팀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뒷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도 괜히 트집 잡히지 않게 유의하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워라밸을 보장하는 직장 내의 룰은 확실하지만, 그 안의 부당함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것도 현실이다.


만약 행정 직원이 나를 타겟팅하여 괴롭히는 것이라면 오히려 클레임을 하거나 보고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내 권리인 휴가를 사용할 뿐인데 의심받는 상황에 열불이 나고 화딱지가 나기도 했다. 화가 나는 마음에 보내지는 않았지만 장문의 상황 설명 이메일까지 썼었다. 평소 나와 편하게 이메일을 주고받던 직원이라 더 의아하기도 했다. 막상 행정직원의 행동을 내가 클레임 하려면, 정말 높은 직책의 헤드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행정과나 인사과 직원들끼리는 워낙 똘똘 뭉치며 서로를 봐주는 경향이 있으므로 내가 클레임을 한다면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여겼다. 그래서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넘어갔다.


 




   미국도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 직장 바이 직장이겠지만, 보편적으로는 해피아워나 리트릿이라는 이른바 회식 문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관련자가 꼭 참석해야 하는 업무상 미팅 외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두가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행사는 거의 전무하다. 웬만하면 참석을 권장 (Recommend라 하지만 사실 참석을 요하는 행사에 주로 쓰는 말로 꼭 참석해야 하는 Required와는 구별된다)하는 행사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로 가족 관련, 또는 구체적이지 않아도 언제나 이유가 될 수 있는 개인 사정 혹은 신변상의 이유로 참여하지 않아도 뭐라고 하는 이가 없다. 친한 사람들끼리는 그 행사에 갈 거냐, 왜 안 왔냐 등의 말이 물론 오가지만, 회식 참석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없다. 한국도 많이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단합 대회 혹은 회식 문화라고 일대일로 온전히 치환하여 사용할 수 있는 미국 단어가 없는 것은 그만큼 개인의 사적인 시간을 보장하는 미국 직장 생활을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물론 상사의 눈치를 안 보고 일만 하면 되는 환경까지는 아니다.





미국의 직장 행사 종류


해피 아워

해피 아워 (Happy hour)는 주로 펍이나 바에서 평일 오후부터 저녁 사이 정해진 시간대에 일부 주류를 평소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시간을 일컫는다. 학교 혹은 직장에서는 주로 평일인 목요일이나 금요일 오후에 모두가 모여서 간단하게 음료 혹은 술을 곁들여 대화하고 서로의 일상을 캐치업 (Catch up)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아주 캐주얼한 분위기이다.

얼마 전 우리 팀의 브레이크 룸에서 가졌던 해피아워의 결과물들


리트릿

리트릿 (Retreat)은 주로 분기별, 혹은 연말에 열리는 큰 행사로 학교에선 과 별로 학생들과 교수, 직원들이 모두 모이거나 직장에선 랩/팀별 혹은 디파트먼트별로 모인다. 공식 리트릿의 경우는 주로 행정 혹은 관리 부서에서 기획하고 개최하는 경우에는 샐러드, 햄과 치즈 플래터, 각종 스낵들 등의 케이터링과 함께 소다와 맥주, 와인 등을 구비해 놓은 미니 와인바가 있기도 한다. 연말에는 중창단이나 삼중주, 댄스 타임 등의 즐길거리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팀 별로 모일 때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레스토랑을 예약하여 저녁 식사를 한다. 간혹 상사가 본인의 집에 초대하여 홈파티를 하기도 한다. 이럴 땐 한 사람씩 음식을 준비해 오는 팟럭 (Potluck) 파티 형식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리트릿에 자주 나오는 치즈와 과일들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직장 내 문화 관련 미팅 혹은 교육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 윤리 교육, 투자와 은퇴, 인사 베네핏, 일과 생활 관리, 동기부여, 시간관리, 건강과 웰빙, 명상, 식단 관리 등 다양한 주제로 교육을 진행하며, 매년 정기적으로 받는 온라인 교육들도 있다.




    작년 겨울, 매우 재밌었던 연구팀의 연말 홀리데이 리트릿은 다른 사람의 선물을 뺏는 것이 재미 포인트인 화이트 엘리펀트 (White elephant) 게임을 했던 행사였다. 미국 사람들은 평소 "미안해"와 "고마워"를 입버릇처럼 말하며 매너를 매우 중시하는 성향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정말 많이 의식한다. 그래서 뺏는 규칙이 있어도 뭐 그렇게 많이 하겠어라고 생각한 나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가서 모두가 전쟁처럼 원하는 물건을 쟁취하려 하는 유쾌한 난장판이 펼쳐졌다. 화이트 엘리펀트 룰은 다음과 같다.


1) 10불 내외 (한화 15,000원 정도)의 모두에게 부담되지 않는 가격의 선물을 미리 준비하여 포장한다.

2) 모이면 선물을 한 데 모은다. 누가 어떤 선물을 가져왔는지 모르는 게 포인트이다.

3) 선물을 먼저 뽑을 번호표를 배부한다.

4) 번호 순서대로 나와서 모두가 보이는 앞에서 자신이 선택한 선물의 포장을 뜯어 보여주고 가져간다.

4) 다음 번호의 사람이 나와서 선물을 선택할 때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이전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물을 뺏거나 (이게 재미다) 포장을 뜯지 않는 선물들 중에서 고르거나.

5) 이전 사람의 선물을 뺏기로 했다면, 선물을 뺏긴 사람은 다시 새로운 선물을 고르거나 아니면 또 본인 이전에 고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물 중에서 뺏을 수도 있다 (본인이 방금 뺏긴 선물은 다시 뺏을 수 없다).

6) 이렇게 선물을 새로 고르거나 뺏겨서 다른 이의 것을 뺏는 과정을 반복하며 모든 사람이 선물을 고를 때까지 진행한다.

7) 한 가지 포인트는 동일한 선물은 세 번 이상 뺏길 수 없다는 것으로, 세 번째로 그 선물을 뺏은 사람에게 귀속된다는 점이다.  


뭐라도 참여해보고 싶어서 나는 어반 아웃피터스의 요즘 유행하는 집게핀을 선물로 준비해 갔다. 내 차례에선 너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인 스누피 포장지의 선물을 골랐고 미국사람들이 정말 좋아하는 시나몬 향의 펌킨 향초를 골랐지만 바로 뺏겼다. 결과적으로는 선물을 다시 골랐고, 밤에 켜는 별과 달 모양의 무드등을 가지게 되었다. 평소 시나몬 향의 소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름 만족스러운 게임 결과였다.


같은 행사에서 쿠키 스왑 이벤트로 받은 연말 테마 쿠키들


나 말고도 선물을 뺏기고 뺏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재밌었다. 가장 인기 있었던 선물은 작은 와플 메이커였는데, 총 2개가 있었다 (와플 메이커가 그렇게 저렴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는데, 아마존에서 20불 정도에 판매하고 있었다). 행정과의 어떤 사람 A가 와플 메이커를 뽑자, 같은 팀으로 그 사람과 친해 보이는 사람 B가 그 와플 메이커를 뺏었다. 그러자 뺏긴 A가 다시 다른 선물을 뽑았다가 그것마저 또 뺏겼고, 여차 저차 해서 다른 사람이 뽑은 와플 메이커를 또 뺏었다. 그러자 역시 뺏어갔던 와플 메이커를 뺏긴 B가 또다시 A의 두 번째 와플 메이커를 뺏어서 결국엔 세 번째 주인이 된 B가 와플메이커를 가지게 되었다. 서로 친한데도 또 악착같이 선물을 뺏는 모습을 보며 너무 어이가 없었고 웃겼다. 팀이 달라 서로 잘 알지 못하는 모두가 게임은 게임일 뿐 신기할 정도로 기분 상하지 않은 즐거운 행사였다.



개인주의가 강하고 사생활을 중시하는 미국 문화를 기반으로 하지만, 내가 만난 미국인들은 다들 모여서 대화하는 걸 좋아하고 이유를 만들어서 홈파티와 모임을 즐기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자신의 친구와 가족들과 하는 것일 뿐.




     직장 생활 속에서 동료와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데, 직장 동료와는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친하게 지내다가도 본인의 입지를 위한 어필을 앞세우거나 어떤 업무에서는 적당히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는 미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그럴 사람은 그런다. 또,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상사의 내려치기 또는 동년배 동료의 시샘도 당해봤다. 그럴 때 직장에서 나를 보호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 평소 실수를 줄이고 평판을 관리해야 하는 이유이다.



말발로 이길 수 없다면, 이메일과 업무 처리 능력과 문서 작성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려 한다.


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경우, 상대적으로 언어적 표현으로 인해 미팅에서 발언이 이해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그로 인해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몰 토크와 가십 문화가 강해서 그때그때 대화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내 친목을 다지기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관찰해 온 결과, 아무리 언어의 벽이 현실이라고 해도, 하고자 하는 말에 내용이 있고 통찰력이 있다면 다들 귀 기울이며 들어준다. 사내 정치에 끼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최대한 미국의 직장 문화를 활용하여 내 일에 집중하고 일로써 인정받으려 노력하고 있다. 미국 직장도 위로 올라갈수록 엄연히 사내 정치가 존재하며, 상사를 대하고 직원들을 아우를 수 있는 리더의 처세술이 정말 중요하다. 매니저 레벨로 올라가면 다른 점도 분명 있겠지만, 결국은 일이다. 내가 남이 가지지 못한 스킬과 경험치가 있다면, 그 일을 필요할 때 결국 나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연말의 리트릿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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