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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디이 Oct 20. 2023

대탈출, 미국 시골 생활을 포기한 이유

뉴잉글랜드의 엄청난 매너는 나를 숨 막히게 할 뿐

갑자기 미국의 깡시골. 팔자에 없던 시골 생활을 하게 되면서 진정한 뉴 잉글랜드인들을 마주치게 되었고 금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철저히 도시체질이라는 것을.



아침 새소리에 눈을 뜨면서 생각했다. 나, 이런 시골에서 과연 살 수 있을까?


푸른 하늘과 온갖 나무들도 잠깐 보면 평화롭다. 여기서 살면 지루하다.



아파트 단지에 살던 오리 가족

     곰도 나오고 사슴과 오리도 지나다니는 자연 속, 일 년의 거의 절반이 겨울인 뉴 잉글랜드 (New England), 영국 식민지에 대항한 보스턴 차 사건 (Boston Tea Party)이 있었던 매사추세츠 포함 6주를 일컫는 지역명이다. 특히 매사추세츠는 미국의 역사, 교육, 문화를 상징한다. 교육은 동부라는 말이 있듯 좋은 학교들이 몰려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지식인을 배출하였고 학문적으로 유서깊은 가문이 많다. 도시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캠퍼스 타운에서 미국 유학생활을 보냈다. 다만 뉴 잉글랜드가 엘에이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 같을 거라 여긴 건 나의 행복회로가 만들어낸 철저한 일반화의 오류였다.





멀지 않은 곳에 이런 산들이 있어서 단풍 구경과 하이킹으로 유명했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오는 동네라 스노우 데이도 많았고, 길을 금방 금방 치워줬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월든 (Walden)>의 저자이자 미국의 생태주의자 겸 철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 Henry David Thoreau)가 살았던 그 잔잔한 월든 호수가 있는 콩코드 (Concord) 지역이 멀지 않았다. 첫 학기 동안은 오랜만의 푸르름이 좋았지만, 4월까지 눈이 오는 긴 겨울이 지긋지긋해졌다. 나중엔 그가 쓴 다른 책인 <겨울 산책 (A Winter Walk)>이라는 책을 읽을 때 그가 묘사한 자연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와 책장을 덮을 정도로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맞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나는 뉴욕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뉴 잉글랜드 사람들의 전통적인 매너를 관찰할 수 있었다. 





뉴 잉글랜드의 품격, 여기 중세시대 영국인가요?


    내가 살았던 곳은 주민 대부분인 코케이션 (Caucasian), 백인인 그야말로 화이트 타운이었다. 학교의 교수진도 공과대학이나 컴퓨터 사이언스학과 말고는 유색인종이 드물었고 학교 스텝도 마찬가지였다. 다운타운의 레스토랑이나 마트 직원들 조차 죄다 백인들이었다. 작은 타운이라 모두가 서로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신경 쓰는 분위기를 대번 눈치챌 수 있었다. 마치 우리네 시골과도 같이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주민 수가 많지 않았다. 오가는 동네에 오가는 사람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고, 갈만한 레스토랑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는 그런 곳이었다.

붉은 벽돌 건물이 많아서 아기자기한 동네, 갈 만한 레스토랑은 정해져 있었다


버스 안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때도 "Sorry"라고 하거나 재채기를 하기 전에 "Excuse me"라고 하는 일이 흔했다. 학교에서도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서로 눈인사를 한다거나 벤치에 가서 앉아있는데 먼저 앉아있던 학생이 갑자기 아주 밝은 목소리로 "Hi"라며 인사하기도 했다. 미국은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매너가 보편적인데, 아주 멀리서부터도 문을 잡아주어 뛰어가야 했다. 하지만, 다수의 경험을 통해 그 진정성에 대해선 회의감을 느꼈던 터라, 오히려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서울이나 뉴욕의 무관심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학교에 있는 짐 (Gym)에서 운동을 마치고 내 매트를 가지고 서 있었는데, 어떤 남학생이 옆으로 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학생은 "Oh sorry, sorry, my bad"를 수십 번 연발하며 자리를 뺏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며 사과 (sorry) 총을 때렸다. 나는 이제 슬슬 집에 갈까 하던 차여서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 학생은 정말 할리우드 액션처럼 너무나 매너 좋게 사과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한국에서는 받아 본 적 없는 그런 종류의 사과에 내가 괜히 미안해져서 머쓱해졌다.


익숙해지고 보니 이런 행동은 퍼스널 스페이스 (Personal space)를 매우 중시하는 미국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줄을 설 때도 동네 사람들은 줄을 서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게 정말 띄엄띄엄 서곤 했다. 촘촘하게 줄을 서는 한국 사람들과 다르게, 서 있는 사람과 그다음 사람 사이에 보통 한 10 발자국은 넘게 떨어져 있다. 주변에 누군가가 있다면 아무리 멀리 서있다고 하더라도 "Are you in line?"이라고 혹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이 두 사람은 같은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이다. 셔틀을 기다리고 있다.


서로의 공간을 배려하는 만큼, 작은 동네일수록, 누군가가 자신을 챙겨줄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기 때문인 듯하다. 거리에서 다른 이와 부딪힐 일도 없었다. 엘리베이터에도 비집고 들어가 남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꺼려한다. 한 5명은 더 탈 수 있는데도 다음에 타겠다고 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물론 사람 많은 뉴욕은 공공장소에서 이런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다.




사람은 살던 곳에서 살아야 한다. 뉴욕에서 공부하고 시골에 직장을 잡았다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학교의 규모만 보고 막연하게 주변이 꽤 큰 도시겠거니 생각했던 과거의 나랑 한판 붙고 싶었다. 나는 입학을 결정하기 전 3일 정도 캠퍼스를 직접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막상 시골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할머니 댁도 도시였던 터라 시골이라는 개념 자체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살아보니 거리엔 조명이 아주 드문 드문 있고 인도도 있다가 없다가 해서 걷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불편했다. 아파트 단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주변은 온통 옥수수밭 아니면 너른 들판이었다. 다운타운은 불과 2-3블록 정도였다. 지하철은 당연히 없었다.

너무 널찍널찍해서 유독 더 길게 느껴졌던 버스 타러 가는 길


조금만 벗어나면 차도 밖에 없다. 차가 필수였지만, 여길 뜨고 만다는 생각에 버텼다.

시골에서는 잘 버티고 공부하여 결과적으로 뉴욕에서 살 수 있어서 정말 운이 좋았다. 몇 년 간의 미국 시골 생활을 통해 나는 도시에서 살아야만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끄러운 도시 소음이 나를 활기차게 했고,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뉴욕에 오니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도시에서의 생활만 경험해 본 도시쥐는 도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들꽃도 가끔 보아야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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