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다른 트렌드를 따르는 듯한 건 기분 탓이 아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뉴요커들의 패션은 말초 신경을 자극하였고, 나의 취향이 과연 무엇인지 돌아보게 했다. 분명 유행하는 아이템이 아닌데도 한번 따라 사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브랜드인데도 한국과 미국 사이 유행하는 방식은 대조적이다.
한국에서도 2년 전쯤부터 유행하는 미국 브랜드 텔파 (Telfar)는 한국과 미국 사이 유행 차이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케이스이다. 현재 미국에선 인기가 살짝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인기이다.
한국에선 하얀색 텔파 미니백을 멘 연예인 사진이 바이럴이 되었다. 실제로 받아보니 정말 작고 마이크로 미니백까지는 아니지만, 핸드폰과 소지품 몇 개 들어가는 정도였다. 앙증맞고 귀엽긴 하다.
텔파는 미국 직구로만 구입 가능한 탓에 텔파 가방 리셀 현상이 일어났었다. 비슷하게 한국에 입점되지 않았던 미국 브랜드인 슈프림 (Supreme)의 리셀 (Re-sell)현상과 비슷하다. 168불 정도 하는 슈프림 로고 후드 스웻셔츠가 미국 내에서도 새 제품이라면 두 배 정도의 가격에 되팔고, 한국에서는 동일한 제품을 4-6배까지도 주고 구매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텔파백의 유행 원인을 살펴보면, 상당히 복합적인 요소들이 얽혀있다.
텔파는 밀레니얼 세대인 아프리칸 아메리칸 패션 디자이너인 텔파 클레멘스 (Telfar Clemens)가 2005년 젠더리스와 다양성을 테마로 론칭한 브랜드이다. 2014년부터 다양한 컬러의 백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텔파백을 맨다는 건, 서로의 이념과 취향을 알아볼 수 있는 커뮤니티 표식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뉴욕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Xya Rachel이 "sorry the bushwick birkin (Telfar bag) stays ON during sex”라며 올린 트윗에 바이럴을 타게 되었다. 텔파의 쇼퍼백이 에르메스 (Hermès)를 살 만한 예산은 없지만 센스는 있는 이들에게 동등한 가치를 제공한다는 의미의 트윗이었다. 이로 인해, 갑자기 텔파백은 버킨백의 대체제로써 상징성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텔파백은 정치적으로는 민주당 (Democratic)을 지지하며, 지리적으로는 브루클린에 살고 패션에 일가견이 있다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나이키의 공식 채널 SNKRS에서 랜덤으로 살 수 있는 덩크 로우에 프리미엄이 붙는 것처럼, 텔파백 또한 한정 판매 전략 때문에 리셀 가격이 높다. 한 달에 한두 번 정기적으로 판매할 때마다 이번엔 하얀색, 그다음엔 연두색, 이런 식으로 컬러 테마를 정하여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판매한다. 이전에 본인이 원하는 특정 컬러가 이미 판매되었었다면, 언제 그 컬러가 다시 나올지 모른다는 게 희소성을 강조한다.
한국에선 흰색, 검정처럼 무난한 계열의 색이 인기라면, 미국에선 다양한 색이 모두 인기 있는 것 같고 주로 라지 사이즈를 선호한다.
이와 더불어, 젠더리스와 함께 'Black owned brand'인 것을 강조하는 모델 광고와 마케팅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러한 움직임을 지지하는 MZ 세대 혹은 아프리칸 아메리칸 헤리테지를 가진 이들이 주 소비층인 듯하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소비를 하고자 하는 미국 소비자들의 적극성이 눈에 띈다.
최근 직원 고용에서부터 미국 헌법에 금지된 인종 차별을 버젓하게 해 온 아메리칸 이글 아웃피터스(American Eagle Outfitters)를 고발하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이나 남성 지향적 판타지를 충족하는 런웨이 쇼로 유명했지만 결국엔 소비자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한 속옷 브랜드인 빅토리아 시크릿 (Victoria's secret)에 대한 저격 노래인 Jax (잭스)의 Victoria's seceret까지, 윤리적으로 깨어있는 소비 습관에 대한 관심이 많다. 미국에선 지속가능한 소비나 비건 열풍에 더불어, 특히 여성 소비자들이 아프리카 아메리칸 계열 혹은 여성이 운영하는 브랜드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데 관심이 많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옮겨간 또 다른 유행으로는 올드머니룩을 빼놓을 수 없다. 4억 명의 가까운 인스타 팔로워를 보유한 잇걸 중의 잇걸인 켄달 제너(Kendall Nicole Jenner)와 그녀의 여동생 카일리 제너가 뉴머니에서 올드머니 패션으로 최근 스타일을 변화시키자 한국에서도 이 유행을 정리한 유튜브 콘텐츠들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연예인 집안에서 태어난 제너 자매는 킴 카다시안의 의부 동생들인데,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어 그녀들의 패션에 이목이 집중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뉴욕에서는 정작 그 영향을 크게 느끼지는 못한다. 올드머니 패션이 이쁘다는 의견은 있지만, “It’s way out of my budge.” 이라며 미국의 대중들이 그 트렌드 하나 때문에 비싼 브랜드들을 사려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올드머니 패션 트렌드에 따라 한국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더 로우, 르 메르, 로로피아나 등 브랜드들은 퀄리티와 소재가 최상급이나 로고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가격부터 타깃이 확실하다. 미국의 상류층 고객들이나 패션 종사자들에게는 잘 팔리는 브랜드이겠지만 아무래도 가성비와 가격을 매우 따지는 미국 소비자들에게 범대중적으로 어필하는 브랜드는 아닌 듯하다.
올드머니 패션은 한국인들이 원래 선호하는 기본템스러운 심플함과 화이트, 베이지, 네이비와 같은 컬러가 주를 이루기도 하고, 소재와 만듦새를 중시하는 경향 때문에 한국에서 더 유효한 트렌드인 것 같다. 참고로 미국 브랜드들은 비슷한 가격 대비 한국 브랜드들처럼 소재 좋은 것을 찾기 어려운 편이다. 깔끔한 디자인을 지향하며 소재가 좋은 클럽 모나코나 빈스 조차도 겨울 코트들의 경우 울 함유량 90% 이상을 찾기 어렵다.
한국에선 거리의 사람들이 마치 한 브랜드의 런웨이를 걷고 있는 모델들처럼 보인다면, 뉴욕의 거리는 마치 다양한 브랜드가 모여있는 애프터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미국에도 화려하면서도 큐트한 빈티지 감성을 잃지 않는 잇 걸 (It Girl) 패션이나 미니멀한 기본 아이템으로 꾸리는 캡슐 월드로브 (Capsule Wardrobe) 등 사람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패션 트렌드가 분명 있다. 그런데도, 뉴요커들은 유행하는 브랜드이더라도 각기 다른 아이템들을 걸치고 자기 스타일이 확실한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와이드 팬츠와 크롭티 등 어떤 실루엣, 브랜드, 색깔이 유행하든지 모두가 사전에 맞춘 듯이 비슷한 무드의 옷을 차려입는 한국의 거리와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온갖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도시에서 밀집되어 복작복작하게 서로의 취향을 주고받는 맨해튼은 그만큼 사람 구경하기 좋은 도시이다.
분명 미국에도 유행하는 브랜드와 아이템들은 있다. 브랜드와 상관없이 항상 품절되는 적당한 길이의 아이보리색 코튼 팬츠, 연청바지, 카멜색 울코트, 검은색 첼시 부츠와 같은 기본템들이다. 여름엔 흰색 스키니나 무난한 아이보리색 3부 팬츠 같은 건 너무 기본 아이템이라서 내 사이즈는 구하기 어렵고, 겨울엔 아이보리색, 검은색, 회색 등의 터틀넥 스웨터가 금방 품절된다. 요즘은 한국에도 많이 보이는 티에 레깅스만 입은 차림이나 겨울에 어그를 신는 것은 미국에선 유행이 아니라 생활이며, 룰루레몬이나 최근 뜨기 시작한 알로와 같은 생활형 요가 웨어 브랜드 지점들이 많이 보인다.
또 연령별로도 추구하는 패션과 유행템이 다르다. 여름 뉴욕의 지하철에서 무리 지어 다니는 10대들이 가장 많이 신고 있는 신발은 흰색 나이키 에어포스이며, 아리지아 (Aritizia) 매장에 가면 20대 여성들은 대부분 짧거나 깊게 파인 흰색 슬리브리스 탑에 적절한 옅은 색의 청바지를 입고 있다.
그리고 웨스트 빌리지에는 등이 훤히 파인 원피스- 길든 짧든, 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 남자들은 대부분 정형화된 패션을 보이는 편인데 주로 계절에 따라 짧거나 긴 면바지에 위는 무늬 없는 폴로 티셔츠나 셔츠에 옥스퍼드화, 운동화 혹은 버켄스탁을 신는다. 나이키는 정말 대중적이며 최근엔 밑창이 독특한 형태인 온 클라우드 (On Cloud) 운동화를 누구나 신는다. 나에겐 편하지 않아서 왜 신는 지는 모르겠다.
미국엔 어떤 아이템이라도 잘 만들었다면 수요가 존재한다는 말이 있다. 시장의 다양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통찰력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획일적인 하나의 유행이 선도하기보다는 다양한 인종과 복합적인 문화가 혼재된, 너무나도 큰 시장이다. 브랜드도 워낙 많다.
소비자의 체형을 고려한-한국에는 잘 없는 플러스 사이즈나 쁘띠 사이즈도 흔히 보인다. 피부색뿐만 아니라 눈동자와 헤어 컬러, 얼굴형과 머리카락의 곱슬기 정도에 키와 몸무게, 체형까지 너무나 다른 경우의 수를 가진 소비자층이 촘촘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쿨톤, 웜톤 혹은 계절별 퍼스널 컬러 같은 가이드가 전혀 유행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미국과 한국 사이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시안 마켓의 테스트 보드라고 불리는 한국도 이제 웬만한 브랜드들이 다 입점해 있으며, 오히려 콘셉트가 확실하고 질 좋은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와 아이템들이 많다. 미국은 보세옷이란 개념이 없어서 어떻게 보면 가격과 품질에 비해서 옷 가격이 비싸기도 하다 (그만큼 세일을 많이 하긴 한다). 그래서 미국 온라인 시장에서 셰인 (Shein)이라는 무국적 중국 브랜드가 마치 쿠팡처럼 저렴한 가격에 많은 디자인으로 엄청나게 선전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인들의 패션이 어딘지 모르게 더 개성 있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본인이 좋아하는 취향을 내 몸에 맞추어 일관성 있게 추구하는 성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피팅 룸에서 우연히 듣게 되는 대화만 보아도 옷이 이쁜 것보다도 자신에게 찰떡같이 어울리는 것을 정말 열심히 찾는다. 온라인 리뷰에서는 "내 눈동자 컬러를 돋보이게 (sparkling) 하는 컬러라 좋다"라던가 "내 피부색과 너무 블렌드 인 (Blends in) 되어 반품했다"와 같은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미국 주요 소비층으로 언급되는 Z세대들은 구제샵 (Thrift shop)에서 Y2K 의상을 보물찾기 하듯 건지는 것이 취미이고, 그러면서도 명품도 좋아한다. 빈티지샵에서 옛날 명품 아이템과 같은 히든 잼을 찾는 Thrift with me (같이 구제 쇼핑해요)와 같은 콘텐츠가 인기이다. 어디에서 샀는지 중요하지 않고 그만큼 자신을 잘 파악하고 패션으로 보완하는 태도, 이런 건 유행 아니더라도 따라 해 볼만 하지 않을까. 별개로, 뉴욕 곳곳의 콜렉트 샵에서 예쁜 아이템을 구경하다 보면 그동안 잊고 있던 물욕이 샘솟는다. 나는 여전히 거리를 오가는 뉴요커들의 패션에 영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