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섹수술을 한 아내는 눈이 부시다고 했다. 장모님께서 해주신 찰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보름달을 보고.
내 눈은 달랐다. 난시로 만사 흐릿한 경계만 더듬는 내가 저리도 명징한 토끼 귀를 본 것이 얼마 만인가. 아직은 디지털카메라 화소보다 내 눈과 시신경의 성능이 좋은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에 한참을 쳐다보았다.
다루는 문명의 이기가 늘어날수록 시각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눈이 혹사당하면서 눈도 자꾸만 나빠지지만(항암 시기를 지나며 이상하게 시력이 좀 떨어졌다), 다른 감각들이 퇴보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어떤 순간을 냄새로, 소리로, 촉감으로 함께 기억하곤 했는데, 좋고 싫은 것, 피해야 할 상황 같은 것들도 그 다른 감각들의 느낌으로 결정했는데. 이제는 마스크를 써 냄새도 차단되고, 블루투스 이어폰이 귀에 고막처럼 달려있어 소리도 심지어 '캔슬링'을 한다. 점점 기능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감각은 생각의 틀을 결정짓는다. 요즘 푹 빠져 읽고 있는 소설가 황정은의 작품 중 '디디의 우산'에서는 시각 장애인의 '점자'에 대응하는 말을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묵자(墨字)'이다. 종이에, 하얀 디지털 화면 바탕에 검은색으로 주로 표기되는 이 글씨. 나도 몰랐다, 이 표현. 왜? 황정은은 일갈한다. '알 필요가 없었으니까.'
너무나 당연하게 내게 부착된 것이고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 감각이다. 몸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식과 사고와 정체성을 틀짓는다. 시각 대신 청각과 촉각에 의지해야 하는 삶에서만 비로소 보이는 묵자의 존재처럼, 이제 피부처럼 붙어버린 마스크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청각 대신 시각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장벽이다.
밤 산책에 마주친 달 보고 시각의 존재를 알아채듯, 가끔 감각들을 점검해 봐야겠다. 특히 환우들은 잘 알리라. 통각. 어딘가에서 뇌로 미세하게 전달되는, 평소와 다르게 좀 아프다는 몸의 신호. 혹시 어디 전이라도 된 것이 아닌가 싶어 유난히 예민해지는 그 느낌. 전엔 알 필요도 없었고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젠 너무 중요해졌다.
달밤에 왜 이리 감각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인가 나도 궁금했는데, 방금 깨달았다. 다음 주 월요일, 석 달에 한 번 돌아오는 CT 정기검진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나도 모르게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