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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 May 11. 2020

2인용 냉장고는 왜 없을까

딩크 라이프, 남들과는 조금 달라도

  냉장고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소파도, 에어컨도 이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혼수를 준비하며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하나씩 결정하던 우리는 의외의 복병과 마주쳤다. 꼭 마음에 드는 냉장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우리의 눈높이가 그렇게 까다로운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제품이 디자인도, 기능도 어느 정도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몇 군데 가전 브랜드 매장을 둘러보고 나니, 냉장고는 두 가지 유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4인 가족'을 위한 양문형 냉장고, 또 하나는 한창 대세로 떠오르는 '1인 가족'을 위한 소형 냉장고였다. 두 가지 냉장고 앞에서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먼저 4인용 양문형 냉장고는 좁디좁은 신혼집의 주방에 놓기에는 너무나 컸다. 너비와 두께가 족히 1미터에 키가 나보다도 더 큰 이 거대한 물체가 도무지 우리 집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하루 한 끼도 집에서 먹을까 말까인 우리가 이 큰 냉장고 안을 다 채울 수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반대로 1인용 소형 냉장고는 너무 작았다. 1인용이라지만 한 사람이 써도 모자랄 것 같았다. 김치통 하나만 넣어도 꽉 찰 만한 냉장고를 둘이 쓰기는 무리였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우리와 같은 '2인 가족'을 위한 냉장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 그럴 법도 하다.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2인 가족'이란 건 없으니까. 두 명뿐인 가족은 그저 '1인 가족'에서 '4인 가족'으로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바로 '출산을 하기 전의 신혼부부'로 말이다. 이제 현실에는 우리 같은 딩크족 부부도 있고, 룸메이트와 함께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 사실이 냉장고 마케팅 담당자의 고려 대상이 될 리 만무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조금 서글퍼졌다. 우리는 평생 2인 가족으로 살 건데, 그럼 우리는 평생 완성되지 못한 가족 취급을 받겠구나 싶어서. 


  하지만 우리는 고민 끝에 아주 현명한 해법을 찾아냈다. 4인용 냉장고를 2인용 냉장고로 쪼갤 수는 없다. 그렇다면 1인용 냉장고 두 대를 놓으면 되잖아! 1인용 냉장고는 작고 아담해서 두 대를 나란히 놓아도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는 않았다. 고작 해봐야 양문형 냉장고 한 대 보다 조금 더 차지하는 정도? 게다가 높이도 낮다 보니 천장이 낮은 우리 집에서도 그렇게 거대한 느낌을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침 국내의 중소 브랜드에서 레트로 디자인의 1인용 냉장고를 출시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깔 별로' 한 대씩, 두 대의 냉장고를 주문해버렸다.


  이삿날에 맞춰 새 가구와 가전제품들이 속속 도착하는 와중에 두 대의 냉장고가 도착했다. 두 대의 냉장고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은 배송 기사님부터였다.

  "그런데, 정말 두 대 주문하신 것 맞죠...?"

  "네, 맞는데요…!"

  "아니, 똑같은 냉장고 두 대가 색상만 다르게 주문이 들어와서 실수로 주문하신 줄 알았지 뭐예요, 하하하."

  하긴 같은 냉장고 두 대를 한 집에서 주문할 일이 흔치는 않을 테니 오해하실 만도 했다. 우리는 작은 주방에 작은 냉장고를 두 대를 나란히 들여다 놓고는 아주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게 바로 2인용 냉장고라고! 


  두 대의 냉장고는 정확히 '2인용'의 역할을 한다. 하나는 나의 냉장고, 하나는 아내의 냉장고. 각자의 냉장고에는 각자의 것들을 넣는다. 함께 먹을 음식들은 소분해서 나눠 넣거나, 공간이 더 많이 남은 쪽에 넣는다. 그리고, 상대방의 냉장고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규칙이다. 간섭하지 않기. 열 집 중 아홉 집의 냉장고는 늘 엉망이기 마련이고, 냉장고 안의 음식 때문에 싸우는 가족들의 모습을 커오는 내내 숱하게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냉장고를 존중하기로 했다. 아내의 냉장고 날개 칸에는 마스크팩이 가득 쌓여있고, 나의 냉장고 날개 칸에는 치킨집 양념 소스와 피자집 갈릭 소스가 잔뜩 쌓여있다. 그래도 싸우지 않을 수 있는 건 자기 냉장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상대방의 먹는 습관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내는 채식주의자다. 아내가 채식을 하게 된 계기는 신념보다는 체질 때문이 더 컸다. 어릴 때부터 고기를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속이 불편했는데, 채식을 시작하고 나서 그런 현상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 아내는 회사에 다니면서 사람들이 남의 식습관에 대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몸소 체험했다고 한다. 아내는 식사 자리에서도 굳이 채식주의자임을 밝히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만을 먹지만, 사람들은 놀랍게도 고기를 먹지 않고 있는 것을 기가 막히게 발견한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아내의 식습관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곤 한다. '왜 고기를 안 먹어?', '그럼 뭐 먹고살아?', '고기 안 먹는 거 건강에 안 좋대, 저탄고지 몰라?', '남편도 채식주의자야? 아니라고? 그럼 남편 밥은 어떡해?' 등등. 식사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경험해보지 않은 내가 상상해보아도 너무나 큰 폭력이다. 당시 아내의 회사는 특히 보수적인 분위기였기에 더욱 스트레스가 컸다. 나중에 이르러서 아내는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지 않았고, 마침내는 회사를 옮겼다. 


  나는 물론 고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와 함께 먹을 음식이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아내는 육류는 먹지 않지만 해산물은 먹는 페스코(Pesco) 채식이기에,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와 입맛이 잘 맞는다. 무엇보다 내가 고기를 먹더라도 함께 식사를 즐기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함께 식사를 할 때면 각자 먹을 음식은 각자 준비한다. 나는 내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 요리를 하고, 아내는 아내의 냉장고에서 고기가 아닌 것들을 꺼내 요리를 한다. 그리고는 한 식탁에 앉아 나란히 식사를 한다. 서로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또 가끔은 좋아하지 않던 것을 상대방 때문에 좋아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냐고, 이 맛을 모르고 어떻게 사냐고, 이런 말들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나는 이제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두 대의 냉장고가 있는 삶에 너무나 만족한다. '자기만의 냉장고'랄까. 그래서 한 번은 두 대 중 한 대가 고장 났을 때, 냉장고를 고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쏟았다. 일주일을 기다려 A/S 기사님이 왔지만, 부품이 없다며 이삼 주는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고 그냥 가버렸다. 우리는 작은 1인용 냉장고 한 대로 그 시간을 버텼다. 마침내 부품이 입고되어 냉장고를 고쳤을 때는 소리를 지를 만큼 기뻤다. 어느새 5년을 넘게 쓰고 있지만 우리는 냉장고를 바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가끔 새로 나온 냉장고의 광고를 볼 때도 우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양문형 냉장고가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 자기 냉장고가 있는 게 최고지. 나는 굳게 믿으며 '1인 1냉장고' 시대를 꿈꾼다. 오늘도 소중한 내 냉장고의 문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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