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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 Jun 09. 2020

일요일 선물

딩크 라이프, 정말 행복한지 궁금하시다면-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집 앞에 잠깐 나갈 준비를 하던 아내가 투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

  “정말 쓰고 나갈 모자가 없다. 어쩜 이렇게 모자 하나가 없지?”

  “모자? 하나 사면 되지.”

  “응? 오빠가 사주려고?”

  나는 장난스럽게 되받았다.

  “그럼 내가 사줄게. 내년 생일 선물로 사줄까? 아니다, 크리스마스 선물?”

  아내는 태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일요일 선물.”


  보통 선물은 기념일에 주고받는다. 우리 부부에게도 숱하게 많은 기념일들이 있다. 결혼하고 나서는 챙겨야 할 기념일이 더 많아졌다. 아내와 나의 생일은 물론이고 연애를 시작한 날,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 1월 1일, 그리고 소소하게 챙기고 넘어가는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심지어 빼빼로데이까지. 이 정도 되면 기념일 중독인지도 모른다. 이토록 기념일을 챙기게 된 건 뻔하디 뻔한 일상 속에서 소소한 재미를 만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일본의 단가 시인 ‘다와라 마치’가 쓴 ‘샐러드 기념일’이라는 제목의 시처럼 말이다.

‘이 맛 좋은데’ 네가 말한 7월 6일은
샐러드 기념일.
다와라 마치, <샐러드 기념일>, 새움

  ‘샐러드 기념일’과 같이 마음만 먹으면 어느 날이건 우리에게 기념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기념일을 맞이한다. 바로 ‘주말’이라고 불리는 날들 말이다. 


  둘 모두가 회사원인 우리 부부에게 주말만큼 소중한 기념일은 없다. 주말이 되어야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고 와인을 마시며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해가 중천에 뜨도록 침대에 누워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기도 한다.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것도 우리에겐 주말에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다. 평일의 우리는 부부라기보다는 한 집에 사는 룸메이트에 가깝다. 오로지 회사에 가기 위해 일찍 잠에서 깨고, 아침을 먹고, 옷을 입는다. 늦은 저녁 집에 돌아오면 곧 다시 회사에 가기 위해 잠이 든다. 심지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마저도 그 날이 평일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간단한 축하의 말을 건네고 넘어갈 뿐, 진정한 파티는 주말이 되어야 할 수 있다. 결국 부부로서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날은 단지 주말뿐이다.


  기념일에 선물이 빠질 수 없다. 주말이라는 기념일이 돌아오면 우리는 선물을 한다. 때로는 서로에게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그렇다. 우리 부부가 함께 하는 가장 즐거운 취미 생활 중 하나는 ‘쇼핑’이다. 주말 아침, 하루의 계획을 세울 때 서로에게 처음 던지는 질문은 항상 같다. 

  “오늘 뭐 살 거 있었나?”

  물론 살 것이 없는 날은 없다. 가장 좋은 핑계는 커피 원두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원두커피를 내려마시는데, 항상 일주일치 분량의 원두만 사놓는다. 그러니 주말이면 어김없이 원두가 똑 떨어질 수밖에. 우리는 원두를 사러 백화점으로, 쇼핑몰로, 마트로 향한다. 원두와 함께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잔 사들고는 신나게 여기저기를 구경하러 다니며 주말의 한나절을 보낸다.


  그렇다고 우리의 쇼핑이 대단히 사치스럽거나 과한 것은 아니다. 대개는 소소한 옷가지나 생활 용품, 읽고 싶었던 책, 그리고 한 주 동안 먹을거리들을 사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 하나 허투루 사지 않는다. 늘 사는 우유 한 팩을 골라도 새로 나온 제품은 없는지, 요즘 유행하는 맛이 있는지, 안 먹어 본 브랜드가 있는지 여기저기 살피고 다닌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수고롭고 귀찮은 일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에겐 단순한 ‘장보기’가 아니라 신나는 ‘쇼핑’이니까. 우유 한 팩에도 쇼핑의 즐거움이 있고 맛보는 설렘이 생겨난다.


  요즘은 이런 쇼핑 문화를 ‘작은 사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포털의 경제 용어 사전에 따르면, ‘사치스러운 느낌을 주면서도 가격이 합리적이어서 만족감을 가지고 소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우리의 소소한 행복에 ‘사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좀 너무하다 싶다. 힘들게 먹고사는 사람들이 자질구레한 쇼핑을 좀 한다고 ‘사치’라고 부르다니. 그런 표현은 적어도 청담동이나 평창동에 계신 부유한 어머님들에게나 어울릴 것 같다. 나는 그래서 우리의 쇼핑을 '일요일 선물'이라고 부르고 싶다. 일주일 간 고생한 우리에게, 드디어 맞이한 주말을 기념해 건네는 아주 작은 선물.


  아내가 모자 투정을 하던 그 일요일, 우리는 김포에 있는 아웃렛에 갔고 나는 아내에게 모자를 선물했다. 곧 다가올 여름에 어울릴 만한 밝은 하늘색 모자를. 그리고 나에게도 일요일 선물을 주었다. 칠십 퍼센트 세일을 하는 운동화와 티셔츠 한 벌, 그리고 내가 쓸 여름 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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