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이 May 24. 2020

우리가 와인을 마실 때
하는 이야기들

딩크 라이프, 정말 행복한지 궁금하시다면-

  어느 금요일 저녁, 우리는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아내가 이야기를 꺼냈다.

  “부부가 안 헤어지고 사는 건 알고 보면 정말 사소한 이유들 때문이래. 그게 뭘 것 같아?”

  아내는 종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읽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주곤 한다. 이번에도 어느 커뮤니티인가에 올라온 글이라고 했다. 

  “뭔데? 아마 자식 얘기겠지? 아니면 돈?”

  “그런 건 하나도 사소하지가 않잖아.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건 되게 일차원적인 것들 이래. 아내의 음식이라던가, 섹스라던가 그런 것들.”

  아내는 설명을 이어갔다. 오래된 부부들 중에는 의의로 아내가 해주는 음식 때문에 관계가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평생 그 음식에 입맛을 맞추고 살았으니 상대가 싫어졌다가도 그 음식 때문에 마음이 돌아온다더라. 섹스도 마찬가지. 사랑이 식었을지언정 주기적으로 섹스를 하면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더라, 그래서 소위 ‘속궁합’이 잘 맞는 부부들이 오래간다더라,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꽤 동의가 됐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음, 그렇다면 우리 부부의 그런 사소한 이유는 뭘까?”

  우리에게도 있다. 별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 부부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그것. 일차원적이지만 고차원적이고, 본능적이지만 심오한 것. 바로, ‘술’이다. 


  매주 금요일 저녁, 퇴근하고 돌아와 집에서 함께 와인을 마시는 것. 그건 사소하지만 아주 중요한 우리의 ‘리추얼(의식)’이다. 금요일에는 되도록이면 다른 약속을 잡지 않는다. 그러기로 못 박아 정한 건 아니지만 암묵적인 룰이랄까. 회사에서 일이 너무 많을 때에도 금요일 만은 일찍 퇴근을 하고 차라리 주말에 출근해 일을 처리하기도 한다. 긴 한 주를 각자 이겨내고 드디어 맞이한 금요일, 그 저녁에 우리는 식탁 앞에 마주 앉는다. 각자 좋아하는 음식들을 준비해 한껏 차려온다(물론 대개는 배달 음식이다). 식탁 위에는 향초를 피워놓고 기분 좋은 음악도 튼다. 우리가 좋아하는 차갑게 식힌 화이트 와인을 잔에 따른다. 그리고 짠 하고 잔을 부딪히며 서로에게 말한다. 우린 이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

  “이번 주도 수고했어!”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술을 뭐니 뭐니 해도 와인이다. 결혼 전 연애를 할 때도 가끔 와인을 마시는 했지만, 결정적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로 우리는 와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작은 항구 도시 스플리트에 도착한 날이었다. 우리는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억수같이 쏟아졌다. 우리는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빌린 작은 우산을 쓰고 저녁 식사를 해결할 음식점을 찾아 나섰다. 광장에 다다랐을 때 레스토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노 스트레스(No-stress) 키친’.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고민할 힘도 없던 우리는 레스토랑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메뉴판을 들여다보는데 와인이 생각보다 저렴했다. 그때까지 유럽여행을 할 때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시킨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물도 비싸서 안 시키는데 와인이라니. 하지만 크로아티아는 상대적으로 물가가 낮았고, 와인은 특히나 싼 편이었다. 그래, 신혼여행이니까. 우리는 문어 샐러드와 레드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그런데, 그 와인이 너무나 맛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한 병을 다 마시고 한 병을 더 비우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너무나 행복해진 나머지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며 숙소까지 달려왔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매일 저녁 와인을 마셨다. 크로아티아의 어느 곳에서나 와인이 싸고 맛있었다. 와인에 적당히 취한 저녁은 어김없이 행복했다. 와인이 이렇게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다니. 행복의 ‘치트키’를 찾은 느낌이었다. 우리의 와인 사랑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장을 보러 마트에 갈 때면 그 주 금요일에 마실 와인을 두 병 씩 사 온다. 인당 한 병씩, 딱 두 병이 우리에게 적당한 양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와인에 대해 잘 안다거나 비싸고 좋은 와인을 마시는 것은 아니다. 마트 직원이 추천해주는 일이만 원 짜리 ‘데일리 와인’을 마시는 것이 대부분이다. 매주 두 병씩 한 달이면 족히 열 병을 마셔야 하는데 감히 비싼 와인을 살 수는 없으니까. 기다리던 금요일 저녁이 되어 와인을 마실 때면 우리 집 부엌은 ‘노 스트레스 키친’이 된다. 지중해의 해변도 없고 문어 샐러드도 없지만 우리는 다시 행복해진다. 함께 마실 와인이 있다는 이유 만으로.


  와인을 마시며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주변 사람들의 소식들, 요즘 읽고 있는 책의 내용들, 재미있게 본 넷플릭스 드라마 이야기들, 그리고 주말에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대개는 사소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수다를 떤다. 나는 술을 좋아해서 다른 사람들과도 자주 마시는 편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아내와 술을 마시는 게 더 재미있다. 나는 아내가 재미있는 사람이라서 좋아했는데, 아내는 술을 마시면 더 재미있는 사람이 된다. 아내도 나와 술 마시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아내는 밖에서는 아예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나와는 마음이 편해서인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최고의 ‘술친구’ 임을 인정한다. 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술 마신 이야기로 책 한 권을 쓴, 역시 최고의 술친구와 결혼한 김혼비 작가는 그녀의 책 <아무튼 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고의 술친구와 함께 산다는 건 세상 모든 술이 다 들어 있는 술 창고를 집에 두고 사는 것과 같다. 언제든 원하는 때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술을 마실 수 있으니까.
김혼비, <아무튼 술>, 제철소


  우리는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술을 마신다. 사소한 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사소한 시간을 보낸다. 사소하지만 행복한 시간, 사소하지만 완벽한 순간이다. 그리고, 오늘도 두 병에서 멈추지 못했다. 둘이서 와인 세 병을 비우고야 말았다. 하지만 괜찮다.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비틀거리며 침실로 걸어가 침대에 쓰러진다. 사소한 밤이다. 기분이 좋다. 





이전 08화 아내가 스톡옵션을 받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