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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 Nov 10. 2021

바다와 파도와 배스킨라빈스

평범한 아저씨의 요가 도전기

  언젠가부터 나의 SNS에 요가와 관련된 광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다니는 요가원의 SNS 계정을 팔로우하고, 또 몇몇 요가복 브랜드의 계정도 찾아보기 시작하면서인 것 같다. 그때부터 종종 새로 오픈한 요가원, 혹은 요가 브랜드의 광고들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역시나 알고리즘의 힘이란.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치곤 했는데, 한 광고 게시물을 본 순간 나는 홀라당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사진 속에서는 한 남자, 그것도 긴 머리의 잘 생긴 젊은 남자가 요가복을 입은 채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요가를 하고 있었다. 이 영화 같은 장면은 뭐지? 궁금해진 나는 곧장 게시물을 클릭해 무슨 광고인지를 확인했다. 내용인즉슨, 제주도의 숨겨진 장소, 그러니까 숲이나 바닷가, 들판에서 원데이 요가 클래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였다. 알고리즘의 무서움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몇 주 뒤 제주도 여행을 떠난단 말이다.


  명절 앞뒤로 맞물린 연휴 기간을 맞아 나와 아내는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사실 해외여행을 떠날 수 없는 지금, 다른 대안 없이 선택한 여행지였다. 때문에 딱히 '제주도에 가서 뭘 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둘 모두에게 없었던 상황. 그런데 그 숲 속의 남자 사진을 본 이후로 나에겐 여행의 목적이 생겨버렸다. 나도 저런 곳에서, 저 남자처럼 요가하고 싶다! 다들 한 번씩은 꿈꾸지 않는가. 이를테면 인도네시아 우붓의 숲 속에 있는 요가원에서, 창문을 다 열어놓고 새소리를 들으며, 나무 냄새 가득 실린 바람으로 땀을 식히며, 고요하고도 평화롭게 요가를 하는 그런 장면. 시국이 이 모양이라 인도네시아로 떠날 수는 없지만, 제주도에서라면 그런 장면이 가능해질 것 같았다. 우리는 몇 군데를 검색한 후, 일정이 맞는 한 곳에서 수련을 신청했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바닷가 잔디밭 위에서 수련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마침내 수련의 날이 되었다. 나의 바닷가 요가의 로망을 실현할 바로 그날. 우리는 시간에 맞춰 미리 안내받은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했던 그림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홈페이지 사진에서는 분명 아무도 없는 잔디밭에서 오로지 선생님과 수련생들만 요가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도착한 그곳은 꽤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산책로 옆 잔디밭이 아닌가. 게다가 바다와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다 보니,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았다. 먼저 도착한 선생님과 수련생들이 매트를 깔고 앉아 있는데, 그 옆을 지나는 사람들이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리도 저 사람들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 요가를 해야 하는 거지...? 뭐랄까, 동물원 원숭이가 우리 안에서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한다면 이럴 기분이려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쭈뼛쭈뼛 매트를 깔고 선생님 앞에 앉았다.


  수련은 명상으로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다 같이 바다를 바라보라고 한 후, 명상 방법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아마 명상을 처음 해보신 분들은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잠재우기가 힘드실 거예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생각들을 떨치기 위해 이렇게 한 번 해보세요. 바다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계속 '바다, 바다, 바다'라고 되뇌는 거예요."

  이 분위기에서 명상이 될까 싶었지만, 나는 선생님의 말에 따라 수평선 언저리의 한 곳을 선택했다. 시선을 계속 그곳을 응시하면서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바다, 바다, 바다, 바다, 바다... 물론 그럼에도 계속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다.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가는 관광객들, 저 멀리서 찐한 스킨십을 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커플들, 등 뒤 도로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까지, 모든 것에 시선과 주의를 빼앗기고 그럴 때마다 생각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바다를 바라보며 계속 '바다'를 뇌되였다. 


  바다, 바다, 바다, ㅂㅏㄷㅏ, ㅂ,ㅏ,ㄷ,ㅏ... 어느 순간부터 '바다'라는 단어의 어감이 어색해지고,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닌 하나의 주문처럼 느껴졌다. 책에서만 읽었던 '게슈탈트 현상', 그러니까 익숙한 대상이 낯선 무언가로 변해버리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그리고, 그때부터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명상은 눈을 감고도 이어졌다. 이번엔 눈을 감은채, 귀를 통해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 중에 오로지 파도 소리만 들으려 애쓰며, '파도, 파도, 파도'라고 계속 되뇌는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바다'와 '파도'를 몇 번이나 되뇌었을까. 어느새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될 즈음,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되었다.


  수련은 익숙했다. 서울의 요가원에서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익숙한 자세, 익숙한 선생님의 구령, 익숙한 힘듦. 제주도라고, 바닷가 앞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수련이 시작되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바다나 잔디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나의 숨과 몸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제주도에 다녀온 지 몇 달이 지난 지금은 솔직히 그날 어떤 수련을 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수련의 마지막 사바사나 자세에서 잔디밭에 누워 눈을 감고 있다가, 모기에게 얼굴을 물어뜯겨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자국이 생겼다는 것 정도. 하지만 '바다'와 '파도'를 끊임없이 되뇌었던 명상의 시간은 기억이 난다. 그토록 바다를 흔들림 없이 오래 바라본 적도, 그토록 파도 소리를 오랜 시간 귀 기울여 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바다와 파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요가원에 갔다. 그날의 수련은 유독 버티는 자세가 많았다. 한 발로 서서 버티는 자세, 몸을 꼬은 채 버티는 자세, 엎드려 버티는 자세 등등등. 어느새 땀이 흐르고 팔과 다리에 힘이 풀려왔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선생님이 아니다.

  "조금만 더 버텨볼게요. 지금부터 다섯 호흡. 시선은 저 멀리 한 점을 응시하세요."

  다섯이라니요,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섯이라니요. '넷' 정도를 외칠 때 이미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힘들다. 힘들어. 너무 힘들잖아?! 이제 그만 내려가자.' 그때 시선 끝에 창밖의 한 점이 걸렸다. 다름 아닌 요가원 앞에 있는 배스킨라빈스의 간판. 퍼뜩 바다와 파도가 떠올랐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속으로 되뇌기 시작했다. 배스킨, 배스킨, 배스킨, 배스킨... 몇 번을 되뇌었을까. 그때, 선생님이 '하나'를 외치고서는 이제 내려와 쉬라고 말했다. 그렇다. 내 마음속에서 '배스킨'이 '힘들다'를 이긴 것이다. 하필 응시해야 할 한 점이 고작 '배스킨'이라니. '나무'나 '구름'이었으면 조금 더 멋졌겠지만, 우리 요가원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 배스킨라빈스인 걸 어쩌나. 어쨌든 수련 내내 난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되뇌었다. 인센스 스틱, 보일러 스위치, 손소독제까지, 시선 끝에 걸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렇게 고단했던 수련은 끝이 났다.


  내가 경험한 명상은 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의 시끄러운 소리들을 잠재우는 것. 그 마음의 소리는 '몸이 힘들다' 일 때도 있고, '요가 끝나고 뭐하지' 일 때도 있다. 퇴사 전까지 나를 괴롭혔던 가장 시끄러운 소리는 물론 '회사 가기 싫다'였고.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봐도 그것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차라리 다른 것으로 밀어내는 것이 더 쉽다. 수련을 할 때면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 그리고 내 몸 근육의 자극에 집중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몸이 가만히 있을 때면 무엇이든 간에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내가 깨달은 방법이다. '바다'와 '파도'처럼 말이다. 그러면 내가 잠재우고 싶었던 시끄러운 마음의 소리들은 밀려나고, 바다와 파도가 내 마음을 채운다. 아, 가끔은 배스킨라빈스도.


  그날 수련을 마치고 나와, 나는 결국 요가원 앞 배스킨라빈스에 들렀다. 눈에 걸린 것이 하필 배스킨라빈스라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몬드 봉봉'과 아내가 좋아하는 '민트 초코칩'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아이스크림을 한 입 깨물어 먹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당분간 아이스크림을 자주 먹게 되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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