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리지엥 Sep 10. 2021

코로나 이후 다시 프랑스 -문화

향수의 본거지가 파리가 아니고 프로방스의 그라스Grasse라고?  -2부

 -1부에 이어서  


   그 이후 샤넬은 자사 브랜드를 세계 최고의 향수 브랜드로 만들어준 향수의 원료들을 지키고 후원하기 위해 그라스 지방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고 향수학교를 세우는 등 그라스 지방을 대표하는 명품회사가 된다. 현재도 샤넬 향수를 만들고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향수 공방과 향수 연구소들이 그라스 지방에 많이 있고 이런 그라스 지역을 위한 샤넬의 엄청난 투자는 프랑스 정부로서도 무시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그만 마을에 불과한 그라스는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향수 본산지, 세계 향수의 메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때는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가 한창이던 16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이 지역 일대는 가죽공방으로 유명했다. 그라스 지방도 중세시대부터 이어져 온 가죽을 다듬는 평범한 지역이었다. 소나 양 등 동물을 잡아서 한 장의 가죽을 만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는데 바로 가죽(동물의 표피)에 붙은 살점을 깨끗이 제거하고 죽은 동물냄새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이 매우 힘들고 중요한 공정이었는데 이런 작업을 ‘무두질’이라고 했다.  즉 무두질이란 동물의 원피(피부)가죽을 얻기 위해 살점과 껍질을 완벽하게 분리하고 역겨운 냄새를 없애는 과정인 것이다. 

   중세시대부터 이어져 온 방식은 끓는 물에 동물 가죽을 넣고 팔팔 끓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가죽을 끓이는 과정에서 매우 심한 악취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뜨거운 물에 끓이고 무두질을 잘 마친 가죽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악취가 배어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 악취를 제거할 특별한 기술이 없던 시절이었다. 즉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멋진 옷이나 장갑, 가방, 모자 등을 얻기 위해서는 역겨운 동물냄새 정도는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가죽 무두질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해 오던 무두질 전문가였던 갈리마르(Galimard)라는 사람이 매우 특별한 방법을 제시하게 된다. 향이 매우 뛰어난 장미꽃과 자스민 등이 많은 그라스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식물 염료 추출법을 응용해서 꽃 향을 품은 향료(에센스, 오일)를 만들었고 이런 향료를 역겨운 냄새가 배어있는 가죽에 사용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얻은 꽃 향료를 자신이 만든 역겨운 동물냄새가 배어있는 가죽 장갑에 뿌렸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생각지 않았고, 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향기로운 꽃 향료와 역겨운 냄새가 나는 동물가죽의 만남은 동네 사람들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게 되면서 일약 지역의 우명한 사람이 됐다. 

   역겨운 동물냄새를 제거한 그의 가죽제품은 더욱 인기를 얻게 됐고 결국 입소문을 탄 그의 장갑(꽃 향료를 품은 장갑)은 당시 프랑스 정치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최고 권력자에게 전달되게 됐다. 이 사람은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 출신이자 프랑스 신교, 구교 종교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였던 것이다. 어린시절,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에서 생활할 때부터 최고의 제품들을 사용했고 명품에 관심이 많았던 이 여인이 지금은 프랑스 왕실의 안주인이 됐던 것이다. 최고 권력자인 메디치에게 보내진 장갑은 메디치는 물론이고 프랑스 왕실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게 되었던 것이다.

  지독한 동물냄새가 아닌 꽃향기가 나는 가죽 제품에 대한 소문은 프랑스 왕실을 넘어 유럽의 왕족과 상류층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졌고 당연히 엄청난 주문이 쇄도하게 된다. 갈리마르의 새로운 시도가 대성공을 거두자 그라스 지방에 있는 가죽 공방과 무두질 전문가들은 자신들도 특별한 향을 만들어서 향기로운 가죽제품을 만들기 위해 저마다 조향사를 고용하면서 더 좋은 향을 만들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파리에서도 엄청 멀리 떨어져 있던 평범한 마을이었던 그라스가 세계 최고의 향수도시이자 아로마 산업의 메카가 되는 계기는 이렇게 가죽제품의 역겨운 냄새를 제거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라스 지방은 물론이고 대부분 지역에서 중세 이후 대대로 내려오던 가죽 가공 산업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갈수록 품질이 더 좋은 가죽을 생산하는 경쟁 도시들이 등장했고, 결정적으로 가죽에 붙는 높은 세금이 엄청난 압박이 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라스 지방에 있는 가죽 공방들은 영세한 규모였기에 파리처럼 대도시 가죽공방과 경쟁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과거 방식을 고집하던 가죽 장인들은 점점 어려움에 처하게 됐는데, 반면 새로운 직업의 사람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뛰어난 향을 만드는 조향사들이었다. 

  갈리마르가 자신의 냄새나는 가죽장갑에 좋은 향을 입혀서 큰 인기를 얻는 것을 본 조향사들은 자신만의 공방을 꾸미고 저마다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갈고 닦은 향수의 원액(향료, 에센셜 오일)을 바탕으로 하는 추출 기술로 자신들만의 전문 영역을 구축해나간 것이다. 그라스 지역의 조향사들에게는 완벽한 조건이어서 그들에겐 향을 만드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고, 그라스 주변의 지역들에는 라벤더, 미모사, 제비꽃, 장미, 재스민 등 조향에 필요한 모든 꽃과 허브들이 사방으로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조량도 풍부하고 햇살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일반 꽃에 비해 향이 훨씬 강하고 좋은 그런 꽃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런 과정과 배경을 통해 프랑스 남단에 위치한 조그마한 중세도시는 향수를 비롯한 향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마을과 도시가 됐던 것이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 페스트 산업(페스트 푸드 등)이 발달함에 따라 자연에서 추출한 천연 향이 아닌 화학 원료로 쉽게 만들어진 향수가 대량 유통되면서 그라스의 향수 산업도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라스가 이런 시대적인 흐름에 따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자연 그대로의 방식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샤넬, 니나리치 등을 중심으로 한 명품 화장품 회사들은 풍부한 향을 머금은 그라스의 수많은 꽃에서 추출한 천연 향료와 오일 등을 계속 생산하면서 전 세계 소비자들을 만족시켰고, 결국 지금까지도 최고의 명성을 유지하게 됐던 것이다. 또한 향수를 만들고 특별한 향을 공부하는 조향사가 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라스 지방에 있는 여러 향수학교와 공방, 연구소로 몰려드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전 12화 코로나 이후 다시 프랑스 -문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