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 La tour Eiffel이 최첨단 소재로 만들어졌다고?
전 세계 도시에 있는 건축물과 구조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파리에 있는 에펠탑 혹은 뉴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일 것이다. 이처럼 누구라도 가장 먼저 연상할 만큼 에펠탑은 파리의 상징을 넘어 프랑스를 전 세계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건축물이다.
이렇게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이나 뉴욕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생각한다면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나 구조물은 무엇일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서울을 상징하는 구조물은 남산타워인가? 아니면 남대문인가? 아니면 덕수궁인가?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파리를 상징하고 프랑스를 알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에펠탑에 대해서 반대하고 흉측하다면서 철거를 주장했던 파리 시민들과 지식인들이 상당히 많았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겨지지만 이 탑이 처음 파리에 세워지던 19세기 말에는 에펠탑 철거를 두고 심각한 파리 시민들의 여론 분열과 반대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오죽했으면 에펠의 설계도를 검토한 파리의 저명한 수학교수는 "에펠의 설계도대로 탑을 건설한다면 탑이 200미터 높이에 이르면 반드시 붕괴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탑을 설계한 에펠은 만일 공사 중에 탑이 무너질 경우 자신의 사비로 전액 보상하겠다는 약속을 프랑스 정부와 한 후에야 간신히 건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이렇게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에펠탑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떻게 건설되었을까? 파리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구조물인 에펠탑이 원래 만들어진 의도는 파리에서 개최하는 당시로서는 대규모 축제인 '세계박람회'(International Exposition) 때 파리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행사 장소를 잘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길잡이 역할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즉 에펠탑은 우리나라도 참가했던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세계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구조물로, 사람들이 파리 어디에서도 박람회 위치를 잘 찾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파리의 대부분 석조 건축물들이 4~5층 높이 정도였기 때문에 육중한 철골로 만들어진 300미터가 넘는 에펠탑은 그 존재만으로 길잡이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높이가 당시 66미터에 불과했다.
원래 에펠탑이 처음 파리에 세워질 때는 세계 박람회가 끝나면 길잡이 역할이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에 철거하기로 계획하고 세웠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많은 파리 시민들은 고색창연한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와 육중한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에펠탑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운 파리의 미관을 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19세기말 당시 많은 파리지엥들의 생각에 에펠탑은 그저 길잡이 역할을 위해 임시로 만든 ‘추악한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반대하는 파리 시민들 중 특히 파리의 문화계와 예술계 그리고 문학계의 유명한 지식인들의 반대가 유독 심했었다. 잘 알려진 일화 중에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을 비롯한 저명 문학가들이 반대를 많이 했고 특히 자신의 집 창문을 에펠탑이 안 보이도록 반대쪽으로 냈다거나, 혹은 매일 식사를 에펠탑 아래 1층 식당에 와서 먹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이유가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이 안 보이는 곳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라는 일화다.
이처럼 흉측한 외관이라는 평가 속에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던 에펠 탑의 철골 노출 구조는 20세기 들어 전 세계에서 철골 구조로 만들어진 철도역사, 교량 등의 철골구조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당시 에펠탑의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설계자인 에펠은 “나는 그 탑이 나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리라 믿는다. 단지 우리가 토목기사이기 때문에 그 설계물이 추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탑의 철거를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논란의 중심에 섰던 에펠탑은 파리 세계박람회가 끝나 지 20년 만인 1909년에 거의 철거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원래 처음의 계획도 박람회 개최 후 20년까지만 탑을 사용하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에펠탑이 당시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기에 최신 라디오 송수신 안테나를 세우기에 이상적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철거위기를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보면 탑 맨 꼭대기에 텔레비전 방송용 안테나(제2차 세계대전 후에 설치)를 비롯한 여러 개의 라디오 송수신용 안테나가 달려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높은 에펠탑 덕분에 1916년 실제로 대서양 너머 국가와 처음으로 무선송신을 하게 됐고 5년 후인 1921년에는 라디오 방송을 할 수 있게 됐으며 현재까지도 텔레비전 송신탑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야간에 멋진 조명을 사용해서 파리를 환히 비추게 된 것은 1988년 나트륨전구가 갖춰지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당시 파리의 고층건물에 해당했던 노트르담 대성당의 높이가 고작 66미터였는데 갑자기 300미터가 넘는, 그것도 철골로 만들어진 시커먼 색깔의 이상한 모양으로 세운다고 하니 당시 파리 시민들의 염려와 걱정도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 설계 당시부터 극심한 파리 시민들의 반대를 겪은 에펠탑은 1889년 5월 15일 세계박람회 일정에 맞춰 완성되었는데 예상보다 적은 불과 300여 명이라는 공사장 인부와 2년 6개월의 짧은 건설기간이 소요된 당시 토목공학의 획기적인 결실이었다. 즉 에펠탑은 19세기 기술의 승리이자 시대의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19세기 당시만 하더라도 ‘철’이라는 소재는 그저 평범한 하나의 소재가 아닌 기술과 진보를 상징하는 최첨단 소재였기 때문이었다. 1884년 프랑스 정부는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 개최를 위한 건축 공모전을 열었는데 이때 정부가 내건 공모전의 조건이 바로 19세기의 기술적 진보와 산업 발전을 상징할 만한 첨단 기념물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당시 기술적 진보와 산업 발전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철이라는 소재를 사용해서 건축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889년 프랑스 정부에서는 박람회를 상징할만한 구조물을 놓고 일종의 공모전을 개최했는데 당시 전 세계에서 700여 개가 넘는 계획안들이 출품됐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계획안들 중에서 프랑스 정부가 귀스타브 에펠이 제안한 오로지 철골로만 만드는 무려 300미터가 넘는 거대한 철골 탑을 최종작품으로 선정했던 이유도 바로 당시 철이라는 소재가 주는 획기적이고도 진보적인 상징성 때문이기도 했다. 즉 철이라는 소재를 다뤄서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한 마디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국가 기술력을 자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에펠탑처럼 처음 계획안을 공모하고 설계할 때부터 이렇게 많은 반대와 비난을 받았으며 반대로 완공되자마자 세계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은 건축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아름다운 석조 건축물들이 즐비한 파리를 망가뜨린다는 시민들과 지식인들의 염려와 비난은 에펠탑이 완공되자 열렬한 찬사로 바뀌었는데, 미국의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에펠탑을 향해 ‘위대한 기술과 아이디어의 현장’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설계자인 귀스타브 에펠은 “프랑스는 300미터의 깃대 위에서 국기가 펄럭이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입니다.”라고 찬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