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 문학관(feat 추모하며)

(故) 이외수 선생님을 추모하며

by 려원


문학관은 대개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당시 강원도 화천의 감성 마을에 있는 이외수 문학관은 국내 유일의 하나로 알려진 생존 문학관이었다. 작년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러했지만 이제는 이외수 선생님께서 고인이 되어 보존 문학관이 되었다. 팬들과 작년 4월 25일에 이별을 하셨으니 이제 1년이 된 셈이다.


지금은 오래전 일이 되었는데 당시 월간지 발행을 위해 선생님의 인터뷰를 다녀온 적 있다. 사람의 일과 이별에는 언제 듯 예고 없이 찾아오듯 그날의 장면을 더 담아 두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한 마음이다


페이스북에서는 선생님이 작고 하시기 전까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몸져누우시던 날부터 아버지를 대신한 아들 이한얼 씨가 선생님이 떠나시는 날까지 팬들과의 소통을 이어왔으며 작년 4월 25일에 고인이 되셨다. 타인의 아픔에는 상대가 어쩌지 못하는 일이기에 내내 안타까운 마음만 이었다.


선생님을 추모하며 당시를 회상해 본다.



이곳은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거의 가까운 입구인데 지금 생각하니 이곳까지 오기 전에는 산굽이를 꽤나 많이 돌아왔던 기억이다. 가기 전 전화 통화로 깜깜한 산골짜기에 있다고 말씀하셨었는데 산굽이를 돌 때마다 느꼈던 부분이고 몇 굽이의 산을 보내고야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안내 표지판이 정성스레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 방문했을 때는 늦은 가을과 겨울의 중간쯤이었지만 계절은 겨울로 가고 있었다.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다 보면 양쪽에 선생님의 시(詩)가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들어온 시비의 글귀가 있었다. 산 여러 갈래 길을 보내고 들어와 이 글귀를 보면 누구라도 긴 숨이 내려앉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 또한 그러했으니..


「이토록 오래 기다려야 굳이 사랑인 줄 아시겠습니까」


사랑에는 여러 갈래의 감정이 있고 그 정의는 뚜렷한 게 없기에 지금도 여전히 많은 여운과 생각을 갖게 하는 글귀다. 당시는 눈에서 보고 마음으로 느꼈지만 이제는 아쉬운 마음만이 자리한다.


「굳이 이것도 사랑인 줄 알겠습니다」



차를 세우고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 선생님의 이미지(왼쪽사진)가 세워져 있고 중간의 사진은 카메라에 담기 위한 포즈였다. 오른쪽 사진의 노란 리본은 당시 선생님께서도 4.16의 아픔들을 함께 하고 계셨으며 방문객들도 같은 마음으로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4.16의 기억은 아직도 우리에게 씻기지 않은 상처이며 시대의 아픔이 되었다. 부디 자라나는 세대들의 이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마음 한쪽에 놓아본다.


선생님께서 생전에 위암으로 고생하시던 적이 계셨다. 지옥같이 힘들던 암수술 전에는 항암치료로 인해 47kg까지 몸무게 빠지셨다. 항암치료 8회에 거쳐 8개월간 진행되었는데 그렇게 아픈 가운데도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놓지 않으셨다.


병원에서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시고 돌아와 즐기시던 차가 황차였다. 황차에는 항염과 항균작용등 여러 가지의 질병에 좋은 차로 알려져 있다. 선생님께서 이 차를 꾸준히 드셨던 이유는 몸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셨다며 이차를 건네주셨다. 차를 즐기며 마셔 보던 맛이지만 여전히 은은한 맛이었다.


그리고,

오른쪽 사진의 ==【어쩜 Shop】


이곳은 원래 매점의 공간이었으나 사모님과 함께 쉼 공간으로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어떤 형태로 바뀌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름이 어쩜 이렇게 예쁠까 하여 한번 둘러보고 나왔으나 내부의 사진은 남기지 못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실내로 향했다. 중간 사진은 선생님이 작품 활동을 하실 때 쓰시던 타자기와 직접 손으로 쓰신 육필 원고지인데 작가의 눈으로 담던 실제 원고지는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을 향한 본인 작품에 대한 열의는 정말 훌륭하시다는 것. 그리고 독자들에게 사랑받기에 충분하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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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활동을 하시던 타자기와 이 문학관의 통로와 벽에는 모두 이외수 선생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을 그리실 때 사용 하셨던 붓과 벽보의 그림과 글. 모두 직접 그리고 선생님의 글씨체로 쓰셨다.



어느 곳이라도 말씀을 드리면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해 주셨다. 이때는 정말 생기 있으셨고 전혀 아픔이 찾아 오리라는 예상을 못했다. 당시 일주일에 100여 장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기에 더욱이 오래 계실 줄 았았다.


그러나 이것도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함의 이유일런지......



세상이 썩어

문 드러 지더라도

너만은 절대로 썩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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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소설 벽오금학도 맨 앞장에 선생님의 유일한 글씨체를 남겨 주셨다.


우) 도전한국인의 월간지 챌린지는 선생님의 내용을 담아 직접 작성한 것으로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단 한 권으로 남게 되었다.(현재 보관 중인 것들)



(故) 이외수 선생님께서는 생전,

문학과 미술, 음악과 방송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많은 예술작품 미디어의 콘텐츠를 창조하였다. 아픔도 기쁨도 부조리함도 그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이겨내려 했으며 그에게 모든 것은 소통이었다. 말로 써가 아닌 행동과 일치하는 그의 진심과 솔직함은 바라보는 청춘들의 대다수가 그에게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혼자 버티면 고통스럽지만 함께 버티면 즐거움이 될 수도 습니다』


그에게 페이스북과 트위터 그리고 카카오 같은 SNS는 어떤 존재였을까?


"저는 이미 그전부터 천리안이나 하이텔 같은 시절부터 PC통신을 즐겨해 왔습니다. 오늘 제가 갑자기 SNS를 시작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렇게 시작해 오며 이젠 저에게 일상과 같은 존재가 되었답니다. 또 하나는 SNS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소통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그냥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많은 메아리가 디어 저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놓질 못한답니다." 《당시 인터뷰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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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이의 고통이 읽는 이의 행복이 될 때까지


좌)

원고 퇴고를 거치는 기간은 짧거나 혹은 굉장한 시간을 요하며, 글 한편이 나오기 까진 흔히들 산고의 진통을 겪는 일이라고 들 한다.(故) 이외수 선생님의 투철한 문학정신은 앉으면 무조건 쓰는 일이다. 밤잠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며, 쓰다가 옆으로 졸음이 기웃하여 몸이 먼저 누우면 그때서야 펜을 놓으셨다. 그 정신은 곧 자신이 독자들을 향한 마음이었다.


창작의 순간은 내 안의 언어 창출로 인한 싸움이기에 작품이 탄생하기까지는 고통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보다 독자들 내면을 향하는 마음길로 가는 시간들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세상이 모나지 않게 둥글게 굴리려 애쓰듯,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작가다.작가는 곧 독자다. 202304231439 P

[본 글은 예전에 작성했던 글 다시 옮겨 봅니다]


우)

지금 누가 깨어 있는가!! 202304231439 P R.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