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1915~2000) 문학관】
황순원(1915~2000)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 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부친 황찬영과 모친 장찬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안 조선시대 영조 때 일명 황고집으로 알려진 효자 집암 황순승이 바로 황순원의 8대 방조이다.
1931년 7월 시 <나의 꿈>을 동광(東光)>에 발표를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했으며,「소나기」의 인상이 워낙 강한 탓에 그저 작가를 ‘서정적인 작품을 쓴 작가’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결코 그것만은 아니다.
평생,
엄격하고 깐깐하게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구축했던 황순원은 104편의 시와 112편의 소설을 남겼다. 황순원이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 우리는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난다. 일제 강점, 전쟁, 민족 분단, 개발 독재의 비극적 역사들이 그를 말해준다.
작가는,
1929년 열다섯 살의 나이로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입학해서 건강 때문에 다시 평양의 숭실학교로 전학하기까지 한 학기를 정주에서 보낸다. 오산중학교에서 만난 남강 이승훈 선생을 보고, 그는 "남자라는 것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라고 느낀다. 성장한 후에도 황순원은 늙을수록 아름다운 또한 사람의 남자를 발견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온 부친 황찬영이 바로 그분이다.
부친은,
그에게 3.1 운동 때 같이 감옥살이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른데 시커멓게 주름 잽힌 얼굴이 어떡해 나 환히 티나 뵈던데, 그리고 말하는 거라든지 생각하는 게 어디나 젊었던데, 나까지 막 다시 젊 어디는 것 같더라."라는 ( 단편소설,「아버지」) 그는 부친에게서 연륜의 미덕을 배웠다.
황순원은,
6,25 동란이 일어나자 경기도 광주로 피난했다가, 1.4 후퇴 때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생활을 한다. 피난살이의 설움은 「곡예사」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통해 전쟁의 혼란과 상흔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도덕적 감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또한 혼란의 원인이 된 남북 이 에올로기의 갈등을 해소라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정립하려는 모색을 보인다. 이 시기 황순원의 문학은 전통적인 삶과 서정을 유린한 전쟁의 폭력성과 거기에서 빚어진 상처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황순원은,
거의 70년에 이르는 작가 경력과 오랜 교율 경력을 통해 많은 문학인을 걸러냈다. 그는 장편 <인간접목>을 쓸 무렵인 1955년 현대문학 추천위원으로 위촉돼 오유권을 시작으로 이호철, 서기원, 최상규, 백우암, 안영, 이성원, 이욱종, 백승인, 김지원, 김채원 등을 추천해 작가로 뽑았다.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우수한 신예작가를 발굴, 배출하였으며 국내 유수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한국 대표작가와 작품을 선정, 격려해 왔다.
오디오북이 설치되어 있는 곳
꿈, 어젯밤 나의 꿈
이상한 꿈을 꾸었노라
세계를 짓밟아 문지른 후
생명의 꽃을 가득히 심고
그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렀노라.
언제든 잊지 못할 이 꿈은
깨어 흩어진 이 내 머릿속에서도
굳게 못 박혔도다.
다른 모든 것은 세파에 스치어 사라져도
나의 이 동경의 꿈만은 길이 존재 하나니.「황순원. 꿈」
작품 소나기는,
시골소년과 도시 소녀의 청순하고 깨끗한 사랑을 소재로 한 순수 소설로 시대에 남겨진 그의 의미지 이기도 하다. 개울가를 배경으로 한 소년과 소녀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는 소년과 소녀의 성격과 심리 변화를 통해 극적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작품이다.
또한 소극적인 모습에서 적극적으로 변해 가는 소년의 행동은 소녀에 대한 소년의 사랑의 깊이가 심화됨을 드러낸다. 특히, 황순원의 깔끔하고 간결한 문체는 이러한 극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작품은,
황순원(黃順元)의 단편 소설로 1959년에 영국의 「인카운터(Encounter)」지(誌) 단편 콩쿠르에 입상하여 우리 문학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통로를 따라 가며 작품과 시화를 감상 할수 있는 곳
황순원은,
일생을 통해 시 104편, 단편소설 104편 중편소설 1편 장편소설 7편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순순와 적제의 미학"으로 한국 문학사의 우뚝솟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그의 순수문학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초월하려는 예술 지상주의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와 치열하게 대결한 작가 의식의 소산이다.
작가는,
1931년 7월 시 <나의 꿈>을 동광(東光)>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일본 동경의 와세다 제2 고등학원으로 유학하여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그 계술연구단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고, 이단체 명의로 27편의 시가 실린 첫 시집 <방가(放歌)를 펴냈다.
또한 1936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 이듬해 5월 두 번째 시집 <골동품(骨董品)> 을 펴내며 시심을 꽃피웠다.
변하는 시대에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와 그의 작품들은 독자와 현시대의 작가들에게 거울이 되어 주고 있다.
님아,
폭풍우가 지둥치던 그 여름날 밤
세상을 허물려는 빗발, 만물을 휩쓸려는 바람
그리고 피난민의 아우성 소리, 죽음의 비명
아 몸소리 나는 그 속에 내 님은 내 손을 꽉 잡고 섰었다
사나이가 왜 그리 무서움이 많으냐고.
님아,
그것은 또 어느 늦은 가을날 저녁
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핥고 옆산에서 꿩이 울어
발아래 바삭이는 낙엽이 옛 보금자리를 그리워할 때
님은 내 가슴을 안고 힘찬 노래를 불렀었다
사나이의 정열이 한결 더 강해지라고.
그러던 님이 내 앞길을 인도해 주던 그 사랑이
지금은 나를 떠났다. 내 마음속을 떠나가 버렸다.
님아,
아무리 사정이 있었기로 옛사랑을 잊겠는가
아무리 옛사랑이기로 딴 님을 좇겠는가
사랑에 주린 사나이 님 잃은 나는 울고 있다
쩡쩡 얼음 갈라지는 강변에서 밤새도록
옛사랑 돌아오기를 빌며 빌며 울고 있다, 피나게 울고 있다
님아,
대장간 풀무에 타는 불꽃이 부럽지 않고
분화구에 뿜어 솟구치는 용암이 그립지 않은가
님아, 내 사랑아,
우리의 앞에는 다시 동반해야 할 험한 길이 놓여 있나니
돌아오라 옛사랑으로, 가면을 버리고 힘의 상징인 옛사랑으로 돌아오라.
「황순원. 옛사랑.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