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한달살이 Day 9
어제 천국과 지옥을 오가서인지 10시쯤 딸이 잠들고 난 후, 쉽사리 잠이 들 것 같지 않아, 냉장고에 있던 빈땅 한 캔과 프링글스와 아이패드를 들고 밤의 테라스로 나갔다. 그곳에서 새벽 1시까지 종이의 집 시즌 5를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 덕분에 오늘 새벽 6시 근처 사원의 기도소리는 못 듣고 7시가 다 된 시각 오토바이 소리에 놀라 후다닥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어제 오전 난생처음 경험해 본 서핑의 여파로 양쪽 팔이 천근만근이었다. 잠시 누워서 9:30에 있을 요가 수업을 째고 룸에서 계속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볼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또 너무 적적할 것 같아 씻고 아이를 깨우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조식 및 가벼운 티타임 후, 환전을 신청하고 요가를 하러 갔다.
요가를 하기 전 “오늘 뭐하지?”에서 나온 선택지는 2가지였다. 영화에 나와 유명한 곳인 빠당빠당 비치를 갈 것이냐 상대적으로 한적한 동쪽에 위치한 누사두아 비치를 갈 것이냐. 나는 4년 전 처음 발리에 왔을 때 누사두아 지역에 머물렀기 때문에 빠당빠당을 가보고 싶었지만 너무 내 주장만을 해서는 안 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4명 중 나 포함 2명이 요가를 하는 동안 나머지 2명에게 정해놓으라고 했다.
요가를 마치고 나니 제법 땀이 나 씻지 않을 수 없었다. 룸으로 들어와 잽싸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로비에서 만났다. 그러는 동안 남은 2명이 딱히 선택을 한 것 같지 않아 빠당빠당으로 가자는 주장을 했다.
여러 명이 함께 어떤 것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할 때, 그것이 점심 메뉴든, 만날 장소든, 만날 날짜든 무엇이든 간에 나는 오래 질질 끄는 걸 싫어하는 편이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나와 취향이 거의 비슷한 사람이 딱 정해주는 것이고(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좀 수동적인 성향이 있지만), 그다음은 내가 생각한 대로 선택하는 것(그 타인이 선택을 못하는 성향일 때는 내가 주도적으로 이끄는 편)이다.
보아하니 서로 배려하느라(눈치 보느라) 결정을 못 할 것 같아서 그냥 내가 정하고 말았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영화에 나와 유명해진 빠당빠당 비치. 입구에 내려 입장 티켓(인당 15,000 루피아)을 끊고 사람이 1명 정도만 지나갈 수 있는 아주 좁은 바위 사이의 나름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파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그 순간 아주 살짝 이 계단의 끝에서 내가 마주하게 될 풍경에 대한 기대를 해보았다.
하지만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바위틈을 빠져나와 처음 눈에 들어온 풍경은 좁디좁은 해변에 싸구려 파라솔과 벤치들, 모래에 아무렇게나 수건을 깔고 그 위에 허여멀건 또는 불그죽죽한 살을 드러내고 누워 있는 외국인들의 모습들이었다.
내가 오자고 한 곳이 별로일 때,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내가 실망한 티를 내면 더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일부러 과장되게 리액션을 해야 함을 알지만, 뭔가 그럴 때는 거짓말이 잘 안 나오는 성격상 그 좁은 해변에서 혼자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래도 남는 건 사진이니 풍경도 찍고 서로 인물 사진도 찍어주고 어색했지만 단체 셀카도 찍으며 빠당빠당 비치에 온 우리의 흔적을 열심히 각자의 폰에 남겼다.
그러는 와중에 해변이 워낙 좁다 보니 조금 센 파도에 신발과 옷이 다 젖기도 했다. 바다에 들어갈 계획은 없었던 우리 중 긴 바지를 입고 왔던 1명은 현장에서 파는 보자기 같은 천을 사서 젖은 바지를 벗어재끼고 보자기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 사이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조금 더 길어진 햇살과 푸른 바다가 만나 반짝반짝거리는 윤슬이 눈앞에 펼쳐지니 여기 오길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윤슬 덕분에 모두들 마음이 말랑말랑 해져서였을까. 우리는 구글링 없이 택시를 타고 오는 길에 보였던 길가의 음식점 중 한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무작정 아까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위로 올라와 바로 처음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음료 3개, 음식 3개를 주문했다. 결과는 대만족. 특히 가격 대비 엄지 척! 셋이서 배부르고 만족스럽게 먹었는데 135,000 루피아(한화 약 12,000원) 라니. 그래 이런 맛에 동남아 오는 거지.
다음 목적지는 숙소 근처에 새로 생겼다는 카페. 우리가 도착하니 마침 안면이 있는 다른 엄마 둘이 음식을 시켜 먹고 있었는데, 음식은 별로라고 했다. 어차피 우리는 음료만 먹으러 온 거여서 상관이 없었고, 카페 다음 목적지가 숙소 근처 마트였는데, 이게 웬 떡. 카페에서 바로 마트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석이조의 상황이었다.
오늘 했던 크고 작은 선택들 중 대부분이 만족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마트에서 각자 필요한 것을 산 후 드디어 함께 해야 할 마지막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숙소까지는 내리막길 약 1km의 거리. 택시를 부르느냐 걸어가느냐. 결정을 해야 할 순간. 망설이는 잠깐의 시간을 못 견디고 나는 걸어가자는 말을 하면서 이미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택시를 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걸어가기 시작하니 우선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걸어가도 괜찮으니 택시 타려면 타고 와.”라고 했지만, 나 혼자 걸어가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계속 나를 따라왔다.
숙소 근처의 도로 상황은 한 마디로 말해 걷기가 힘든 상태였다. 차도는 왕복 2차선인데, 도로에 차들 못지않게 오토바이가 빽빽했고, 인도가 있지만 도로를 달리던 오토바이들이 마구잡이로 인도를 점령하는 그런 상태. 도로 중간에는 신호등이나 횡단보도 자체가 아예 없어 길을 건너려면 말 그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양쪽을 모두 확인한 후 잽싸게 뛰어가야 했다. 그나마 좁은 2차선 도로라 건너야 하는 거리가 짧은 것이 천만다행. 그리고 차와 오토바이에서 유독 매연이 심하게 나오는 최악의 상황.
현지에서 좀 걸어도 다녀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만 막상 200m 정도 걸었을 때 조금 후회가 되기는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왕 걷기로 했고, 이제 700m만 더 가면 되는데 끝까지 가봐야지. 더위와 매연과 오토바이 소리에 지쳐갈 때쯤 저 앞에 호텔 근처의 익숙한 간판이 보이자 그게 뭐라고 참 반가웠다. 그렇게 호텔 안으로 들어오니 집에 온 것 같은 안락함 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나름 여행이 아니라 살이에 가까운 체험을 많이 하고 돌아온 후에도 일정을 마친 딸과 함께 오후 시간을 뭘 할지, 저녁은 또 뭘 먹을지, 오늘의 그림은 무엇으로 할지 등에 대해 계속 선택을 해야 했다.
현재 시각 밤 9:20. 한국에서라면 아직 초저녁인 시간이지만, 어제 잠을 덜 자서인 건지, 원래 해외 살이라는 게 특별히 하는 게 없어도 힘든 건지,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이 글만 올리고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내일은 하루 종일 물놀이가 계획되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