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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만화가 Nov 13. 2024

[단편소설] 사랑을 위한 달리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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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녀에게 무언가 다정한 말을 해주고 싶다. 나는 도나 마르티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손가락 사이를 흐르는 물처럼 빠져나간다.


“밤이 되니깐 역시 꽤 쌀쌀하네.”


그녀는 내 말을 흘려보낸다.


나는 그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바지를 입고 오두막 밖으로 나간다. 바다 위에 놓인 나무다리 옆으로 동일한 모양의 캐빈 여덟 개가 열매 열리 듯 달려 있다. 모두 불이 켜져 있다. 잠이 든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나는 가장 가까운 오두막으로 가서 문을 두드린다. 왕 씨 형제 중 첫째가 문을 열고 나온다.


“무슨 일?”


“혹시 이불 남는 것이 있나 해서요.”


“우리는 두 명이라 남는 게 없어.”


“아, 그렇죠.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으려고 하지만, 그가 문을 잡고 버틴다.


“혹시 그 여자랑 같이 있어?”


“그 여자요?”


“그래, 그 여자.”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누구긴 누구야? 그 빌어먹을 침팬지 새끼 꼬봉을 빼면, 여기에 여자는 한 명뿐 이잖아. ”


“아, 그분이요? 아니요. 저는 몰라요. 어디서 달리기 연습이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듯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는 한 손으로 정수리를 벅 벅 긁는다. 그리고 빵, 쓰같은 짧지만 된소리가 잔뜩 담긴 중국어 욕을 내뱉는다.,


“진짜 달리기 하려나 내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우리는 잠시 침묵한다. 나는 우리가 같은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생존자나 물자를 찾아야 한다며, 비행기 잔해를 뒤지는 이브. 이브의 손끝에서 육포처럼 찢겨나가던 시체.


“가볼게요.”


나는 그를 남겨두고 뒤돌아선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왕 씨 둘째가 왕 씨 첫째에게 중국어로 무어라 말을 한다. 왕 씨 첫째는 내가 자신의 캐빈에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문을 닫는다.


다음 캐빈으로 간다. 문이 열려 있다.


열린 문 너머로 과자를 뜯어먹고 있는 김형태 교수가 보인다.


“과자가 있으셨어요?”


“어. 아까 주웠어.”


“걸리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그러려나?”


김형태 교수는 관심 없다는 듯 과자를 주워 먹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이불을 좀 얻어갈 수 있을까요?”


“그래. 알아서 가져가.”


나는 테라스 쪽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이불과 시트지를 벗겨 든다.


“과자도 몇 개 가져가도 될까요?”


“그래 그래.”


김형태 교수가 오레오 두 봉지를 내 손에 쥐어준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다.


“내일 어떻게 될까요?”


“달리기 말이니?”


“네, 달리기요.”


“달리겠지.”


김형태 교수는 남의 일인 것처럼 심드렁하게 말한다.


“교수님도 달리실 건가요?”


김형태 교수는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구경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평생 달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다.”


“그래도 내일은 달리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괜히 이브 눈 밖에 났다가는 어떤 꼴이 될지 모르니까요.”


김형태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설마 걱정해 주는 거니? 고맙구나.”


그리고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 웃어 보인다.


“여하튼, 좋은 시간 보내거라.”


나는 잠깐 멈칫했다가,  감사하다고 말하고 캐빈을 빠져나온다. 어쩐지 속이 답답하다.


도나 마르티노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다. 한쪽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맞이한다.


“자기 혹시 스노우 패트롤이라고 알아?”


“스노우 패트롤이요?”


“응. 영국 밴드.”


“처음 들어봐요.”


“정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래도 꽤 유명한 편인데… 돌아가면 좀 더 열심히 하라고 해야겠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애정의 잔향을 느끼고 코를 찡긋거린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 과자 이야기를 꺼낸다.


“과자를 좀 얻어왔어요.”


좋은 소식이라며 그녀가 활짝 웃는다. 나는 이불을 그녀 위에 한 겹 더 덮어 주고, 그녀에게 오레오를 내민다. 그녀는 과자를 받아 들고 유심히 보더니,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다. 나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으니 그녀에게 다 먹어도 된다고 말한다. 그녀가 다시 웃는다.


“고마워. 내일 달리기 시작하기 전에 먹고 힘낼게.”


“달리기 정말 할 거예요?”


나는 생수병을 뜯으며 묻는다. 다행히도 섬에는 생수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응. 기왕 하는 거 일등 해야지.”


도나 마르티노는 운동회를 앞둔 소녀 같은 표정이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타히티 리조트로 신혼여행을 온 사람 같다. 해발 10km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물 한 통을 한 번에 다 비운다. 그나마 물이 풍족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안 먹어도 괜찮아?”


도나 마르티노가 되묻고, 나는 정말 괜찮다고 말한다. 이건 정말이다. 오후에 그 장면을 본 이후로는 전혀 식욕이 돌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 내 생각에는 내가 제일 빠를 것 같으니깐.”


도나가 말한다. 그리고 두 손을 뒤통수에 괴며 미소를 짓는다.


“내가 이기면 너를 부대장으로 임명해 줄게.”


얼굴이 붉어진다. 혈류가 몸의 곳곳으로 도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만약에 그녀와 평범하게 만났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중에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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